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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 10. 1 (토) 04:00 교대앞 "한번 마음을 빼앗기면 깊은 병을 앓게 된다." 사람 이야기가 아닌 산 이야기다. 칠선계곡 위 대륙폭포골의 단풍과 한신지곡의 단풍을 보고나면 미치지 않으면 깊은 병이 든다는 말이다. 칠선폭포와 대륙폭포는 저번 달 제석봉골로 오르면서 이미 가 보았지만, 가을이 문턱에 선 때인만큼 이번에도 백무동에서 창암능선을 넘어 칠선폭포와 대륙폭포를 보고 대륙폭포골로 해서 단풍을 즐기고 하봉헬기장으로 올라 중봉과 천왕봉 그리고 제석봉까지 가서 한신지곡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잡았다는 것이 이대장의 辯이다.
"그 너무 긴 코스 아니오?" "그 정도야 뭐"
무릇 사람의 일이란 한 치 앞도 못내다 본다고 불과 한 달 전에 1박2일로 다짐해놓고서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포기하고 당일치기로 새벽길을 내달린다. "오늘도 일출이나 석양은 글렀다." 지리산을 숱하게 다니면서도 제대로 된 일출일몰 사진 한 장 찍어보지 못한 아쉬움이 늘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아는 어떤 분은 사진 찍는 사람을 경멸한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거 찍어서 뭐하게요, 인생은 '지금' 이라는 순간을 위해서 사는 거지 사진으로 남겨 다시 회상하는 것이 뭔 의미가 있냐고요?" 백번 맞는 말이다. 지나간 과거는 되돌릴 수 없고 미래란 현재의 삶을 덧쒸우려는 불확실한 기대치일 뿐이다. 지금을 잘 사는 것이 최선의 인생이다. 그럼 나는 왜 쓰잘데기없이 사진을 찍거나 글을 써 자국을 남길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언젠가는 안할 것이다. 다만 눈과 글로 다시 되새김질하는 맛이 조금 다른 것은 있다. 기억이라는 한계도 있고...
창암능선 안부
6:45 백무동 집단시설지구 초입에 도착하여 팬션 뒤의 축대같은 산길로 올라선다. 30분 정도 올라가니 인민군사령부터다. 지난 번에 지난 인민군사령부터에서 우측으로 빠지는 바람에 알바를 하여 두 시간만에 그것도 고생고생하며 올랐던 창암능선 안부를 곧바로 올라가니 한 시간만에 도착한다.
벽송사는 칠선계곡 입구의 추성리에서 광점동 가는 어귀의 절 이름이다. 추성리 곧 칠선계곡 인근에는 두지터 말달린평전 마천 영랑대 어영대 등 옛날 신라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명이 더러 남아 있는데 추성楸城리에는 옛 성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짐작컨대 이 성의 기능은 당시 신라와 백제간의 국경선인 운봉에 위치한 아막산성 (백두대간은 전 지역이 사실상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 역할을 했다)의 후방지원부대 역할을 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왜냐면 운봉의 넓고 기름진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오랜세월 신라와 백제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흔적이 운봉의 아막산성에 전해져 오고 있으며 마천은 운봉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달린평전은 신라군이 말을 훈련하던 곳이며 (지금의 馬川이란 지명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 두지터(오늘날의 뒤주로 이해하면 될까?)는 식량을 보관하던 곳, 하봉 아래 영랑대는 신라 화랑이 훈련하던 곳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광점동 입구의 어영대는 신라 26대 진평왕이 피난(?)왔던 곳이라 전하는데 칠선계곡의 '국골'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칠선폭포 대륙폭포
땀흘린 댓가를 치러야제~
대륙폭포골로 들어서니 골짜기는 그 이전부터 상했는지 아니면 올 여름 태풍 무이파 때문인지는 몰라도 곳곳이 쑥대밭이 되어있다. 칠선계곡만 하더라도 이름난 여러 폭포들이 자갈이나 돌무더기로 메워져 버려 조그만 소로 변해버렸다.
단풍이 피기에는 시기가 너무 이른가. 계곡 상류 쪽으로 많이 올라 왔음에도 가을의 전령은 가지 끝에서 마냥 대롱거리며 푸른 하늘의 눈치만 살피듯 숨을 죽이고 있다. 대륙폭포골에는 물길이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계속하다 폭포도 거의 산 정상까지 이어진다. 계곡산행의 묘미 중 하나는 계속되는 절경에 지칠 틈이 없다는 것이다. 이 폭포를 지나면 다음 계곡에 다른 폭포가 기다리고 있고 또 그 위에 沼가 있고 물이 흐른다.
멀리 바래봉 능선이 보이는 중봉 아래쯤 계곡을 벗어나니 1시가 훌쩍 넘었다.
중봉에서 멀리 달뜨기 능선 함 보고...
중봉에서 보는 천왕봉 중봉에서 천왕봉으로는 처음 간다. 30분. 주로 써래봉이나 두류능선 방향으로 되돌아 내려갔기 때문이다.
천왕봉(1,915m)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서다. 남한에서 한라산(1,950m) 다음으로 높다. 날이 좋아 남해 바다도 환히 보인다.
천왕봉에는 연휴를 맞아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제석봉에 도착하니 날이 너무 맑아 무미건조하다. 천왕봉과 중봉에 약간의 가림막도 없으니 재미가 덜하다. 구름이나 안개로 가리면 "산신령님, 우짜든동"하고 술 따르고 절 오리고 애걸복걸 하다가 막상 홀딱벗겨 훤히 보여주니 이게 뭥미?
시간이 3시 반쯤 되었다. 그냥 하산하자니 아깝고 당초 1박2일 하려던 생각도 나고 하여 "에이, 석양이나 보고가자!" "너무 늦어지지 않을까?" "헤드랜튼 다 가지고 왔는데, 뭐" 해는 중천에 떠 있고 산정에는 찬바람도 슬슬 분다. 어두워 질 때까지 두어 시간 동안 남은 뭐하나 "한잠 자자" 술 남은 것 한 잔씩 마시고 자리를 편다. "배암 조심해라!" "물리면 가는거지" 키 낮은 덤불이나 조릿대 속에는 배암이 많다. 특히 가을 배암은 독이 오를대로 올라 물리면 큰일난다. 1시간이나 눈을 붙였을까. 누워있으려니 조금씩 추워진다. 부스스 일어나 겉옷을 꺼내 입는다.
영신봉에서 이어지는 지리 남부능선으로 햇살이 기울고 멀리 섬진강 건너 백운산과 억불봉이 고개를 내민다. 해가 서쪽으로 조금씩 기울자 지리산은 서서히 속살을 숨기며 짙은 윤곽선으로 변이를 시작한다. 色이 空의 본래 자리를 찾아가는 듯 그 속에서 연하디 연한 운무가 피어오른다. 色과 空이 본래 둘이 아니듯 반야봉과 노고단, 만복대 그리고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맑은 지리산과 석양의 산그리메가 화선지 위 먹의 번짐을 연출하는 지리산이 본래 둘이 아니었나 보다.
고전주의 화가들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린 반면,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은 사물이 아니라 빛을 그리려 했다고 한다. 사물은 빛의 상태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르게 보이니까. 그래서 모네는 같은 화가는 대상을 아침에 한 번, 점심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그렸다고하는데, 사진도 빛의 예술이라 산 사진을 찍는 사진쟁이들은 비오는 날 저녁 무렵이면 일출을 찍기 위해 비를 맞으며 산에 오른다. 비 온 후면 산도 빛에 따라 많은 변화를 가지기 때문이다. 특히 지리산 같은 큰 산인 경우에 운무라는 변수가 추가되어 그 변화의 끝을 모를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에 미쳐 자기 몸짝만한 배낭을 둘러메고 산으로 산으로 오르나 보다.
꽃들이 떠난 자리에는 바람의 흔적만 남았다. 지난 달 (9.3)에 왔을 적만 해도 구절초와 쑥부쟁이, 산오이풀이 만개하던 제석봉 천상의 화원에는 그새 꽃들은 사라지고 쓰러진 마른 풀잎 위로 바람의 흔적만 남았다. 바람을 피해 바위 앞에 앉아있노라니 방한복을 입은 젊은 친구가 풀숲 사이로 고개를 쓱 내민다. 이대장이 묻는다 "자러 왔습니까?" "예" "혼자 왔습니까?" "---" 조금 두리번거리다 사라진다. 이윽고 큰 배낭을 매고 부인인듯한 젊은 여자와 다시 나타난다. 제석봉에는 텐트를 칠만한 곳이 두어 군데 있는데 옛날 제재소 자리는 바람이 좀 심하다. 아래 제석당 터에는 공단에서 아예 밭을 일구어 텐트를 못치게 만들어 놓았다 한다.
차가운 바람부는 제석봉 고사목 지대에서 보는 먹먹한 석양의 지리는 뜨겁게 오르는 일출이거나 장렬하게 사라지는 핏빛 일몰보다 더 그리운 모습으로 깊어간다.
검푸른 여백은 허공의 빈 산이 돛단 배로 떠도는 강물이 되어 떠나야 할 자와 남는 자 사이의 別離의 시간이 되었음을 알려주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검푸른 산을 보면 곧잘 일찌기 죽은 누이를 떠나보내며 지은 '강물 빛은 푸르렀네'라는 연암의 글을 생각하게 된다.
"유인의 이름은 아무이니, 반남 박씨이다. 그 동생 지원 仲美는 묘지명을 쓴다. 유인은 열여섯에 덕수이씨 택모 백규에게 시집가서 딸 하나 아들 둘이 있었는데, 신묘년(1771) 9월 1일에 세상을 뜨니 얻은 해가 마흔 셋이었다. 지아비의 선산이 아곡인지라, 장차 서향의 언덕에 장사지내려 한다. 백규가 그 어진 아내를 잃고 나서 가난하여 살 길이 막막하여, 어린 것들과 계집종 하나, 솥과 그릇, 옷상자와 짐궤짝을 이끌고 강물에 배를 띄워 산골로 들어가려고 상여와 더불어 함께 떠나가니, 내가 새벽에 두포의 배 가운데서 이를 전송하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아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 화장하던 것이 어제 일만 같구나. 나는 그때 갓 여덟 살이었다. 장난치며 누워 발을 동동 구르며 새 신랑의 말투를 흉내 내어 말을 더듬거리며 점잖을 빼니, 누님은 그만 부끄러워 빗을 떨구어 내 이마에 맞추었다. 나는 성나 울면서 먹으로 분에 뒤섞고, 침으로 거울을 더럽혔다. 그러자 누님은 옥오리 금벌 따위의 패물을 꺼내 내게 뇌물로 주면서 울음을 그치게 했었다. 지금에 스물여덟 해 전의 일이다. 말을 세워 강 위를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은 바람에 펄럭거리고 돛대 그림자는 물 위에 꿈틀거렸다. 언덕에 이르러 나무를 돌아가더니 가리워져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강 위 먼 산은 검푸른 것이 마치 누님의 쪽진 머리 같고, 강물 빛은 누님의 화장 거울 같고, 새벽 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그래서 울면서 빗을 떨구던 일을 생각하였다. 유독 어릴 적 일은 또렷하고 또 즐거운 기억이 많은데, 세월은 길어 그 사이에는 언제나 이별의 근심을 괴로워하고, 가난과 곤궁을 근심하였으니, 덧없기 마치 꿈속과도 같구나. 형제로 지낸 날들은 또 어찌 이다지 짧았더란 말인가. 떠나는 이 정령코 뒷 기약을 남기지만 오히려 보내는 사람 눈물로 옷깃 적시게 하네 조각배 이제 가면 언제나 돌아올꼬 보내는 이 하릴없이 언덕 위로 돌아가네." [정민 교수 역] 석양이 지고 하산을 서두른다. 제석봉에서 비박할 청춘남녀에게 "좋은 밤 보내라"고 인사하고 내려오는데,백무동에서 또 다른 청춘남녀들이 무거운 배낭을 지고 줄지어 올라온다. 부지런히 지리산길을 다니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백무동에 도착하니 8시반쯤...아무리 밤중이라도 알탕이 빠지면 산행을 하지않은 것과 마찬가지다란 소신으로 계곡으로 내려간다. 이대장은 알탕 잘 할 수 있는 자리는 산길만큼도 확실히 찍어두고 다니는 것 같다. 후래쉬 켜 놓고 하는 알탕, 이거 해 보면 기막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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