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가 사관이 쓴 정사(正史)라면 <삼국유사>는 스님이 쓴 야사(野史)다. 정해진 틀이 있는 유교의 문신귀족이 쓴 <삼국사기>에 견줘 <삼국유사>는 매임이나 걸러짐이 없이 자유롭고 진솔하다. 오늘날 <삼국유사>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다. 만록(漫錄)으로 보기도 하고 미완성 작품으로 여기기도 하며 또 불교라는 특정 종교의 역사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처럼 평가가 엇갈림에도 누구나 크게 인정하는 <삼국유사>의 가치가 있다. 유사(遺事)로서 갖는 특징이다. 정사인 <삼국사기>가 놓친 부분을 <삼국유사>가 제대로 보완하고 있다는 얘기다. 일연(一然, 1206~1289)은 전국을 두루 여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과정에서 얻은 사료의 발굴과 수집, 현지 답사를 통한 유물·유적에 대한 관찰, 사료 검증, 객관적 서술을 위한 배려 등을 고스란히 책에 담았다. 역사가로서 일연의 노력이고 그 결과로 <삼국유사>가 만들어졌다. 유교사관에 젖어 있던 당시 사람들과는 달리 눈길이 기층민의 삶을 따뜻한 애정으로 감싸고 있었음을 때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을지라도 지금 관점에서 본다면 대단한 가치이고 힘이다. 거기에 더해 <삼국유사>를 통해 담아낸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은 권력과 권위, 물질을 지향하는 삶에 찌든 오늘날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바가 크다. 육당(六堂) 최남선(1890~1957)은 일찍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될 경우를 가정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라 말했다. 그만큼 매력 있는 역사서가 <삼국유사>다.
비슬산과 일연은 인연이 깊다. 일연은 지금의 경산(경북)인 장산에서 태어났다. 22세에 승과에 합격해 20년 동안 수도를 거듭하면서 보당암·묘문암·무주암 그리고 인흥사와 용천사를 거쳤는데 이 모두가 비슬산에 있다. 일연이 비슬산에서 묵은 22년 세월이 <삼국유사>의 태동이나 완성과 무관하지 않았다. 일연은 나이 드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경북 군위 인각사로 와서 <삼국유사>를 완성하고 삶을 마무리했다. 일연 스님과 삼국유사의 자취를 따라 떠나는 여행길은 비슬산 유가사에서 시작해 삶을 마친 군위 인각사에서 마감된다.
- 유가사와 도성암 <삼국유사> 속 관기와 도성의 일화를 떠올리다
유가사(瑜伽寺)는 비슬산 천왕봉 기슭인 대구 달성군 유가면에 있다. 827년인 흥덕왕 2년에 도성(道成)이 창건하였으며, 한때는 3000명 남짓 되는 스님들이 머물기도 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탔다. 대웅전 앞에는 인근 원각사터에서 옮겨온 삼층석탑이 있고, 절간 오르는 길목에 승탑들이 있다. 유가사에는 일주문도 불이문도 없다. 대신 돌로 만든 돌문과 돌탑들이 있다.
유가사에서 발길을 돌려 찾아가는 곳은 도성암이다. 982년 성범이 중창한 이곳에는 일연이 지은 <현풍유가사도성암사적>이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널리 알려진 '포산이성(包山二聖)'대목은 이렇다. 관기(觀機)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정했고 도성(道成)은 북쪽 바위 구멍에 자리를 잡아 서로 떨어진 거리가 10리쯤 됐다.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면서 매양 서로 찾아다녔다. 도성이 관기를 청하려 하면 나무들이 모두 남쪽을 향해 엎어져 마치 환영하는 것처럼 돼서 이를 보고 관기가 갔으며 관기가 도성을 맞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관기는 관기봉으로 남았고 도성은 후세 사람들이 도성암으로 남겼다. 일연은 이어지는 글에서 "두 분 스님이 오랫동안 바위 너덜에 숨어 살면서 인간세상과 사귀지않고 모두 나뭇잎을 엮어서 추위와 더위를 넘기면 비를 막고 앞을 가렸을 뿐"이라면서 "옛날에 은둔생활을 한 인사들의 숨은 취미를 알 수 있으나 본받기는 어렵다"고 적었다. 도통 굴 아래에 있는 도성암 들머리에는 수도에 방해가 되니 말을 삼가라는 안내판이 걸려 있다. 도성암에 들어서자 마당 가운데 삼층석탑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특별한 것도 없이 무던한 탑이다. 그럼에도 한없이 너그러워 보인다. 빈 공간 때문이다. 비워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발걸음을 대견사지로 돌린다.
- 대견사지 우주를 온 몸으로 끌어안은 듯한 삼층석탑
비슬산 휴양림을 따라 올라가다 자동차가 갈 수 없는 지점에서 2.5km 정도를 걸어 올라가면 대견사터와 삼층석탑, 조화봉이 기다리고 있다. 비슬산 정상에서 참꽃군락지를 스쳐지나면서 월광봉을 지나 내려와도 대견사지를 만날 수 있다. 9세기 신라 헌덕왕 때 창건된 절이 대견사(大見寺)다. 이제 절터에는 석탑만이 남아 있다. 대견사라는 절 이름에 얽힌 일화가 있다. 중국 당나라 황제가 절을 지을 곳을 찾았지만 마땅한 자리가 없어 상심하고 있다가 어느 날 세수를 하려고 물을 떠놓은 대야에 경치가 아름다운 산이 비춰졌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 대견사 자리였다. 도성암에서 느꼈던 탑에 대한 감흥은 대견사지 삼층석탑(대구광역시유형문화재 제42호)에서 절정에 이른다. 아득한 낭떠러지 끝에 우주를 온 몸으로 끌어안은 듯한 석탑이 우뚝 서 있다. 실제 몸체에 견줘 열 배는 더 웅장해 보인다. 대견사는 일연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라고 한다. 대견사 복원을 진행하고 있는 조계종의 말이다. 역사 기록에 남아 있는 보당암이 바로 대견사라는 얘기인데, 관련 기록이 <동문선>에 나온다고한다. 일연은 보당암에 머물렀는데 여기서 <삼국유사>의 집필을 시작했거나 구상했을 것이다. 절터로는 씩씩하기 이를 데 없는 경남 합천의 영암사지에 견줘도 전혀 모자람이 없다. 구체적 형상에 치중하기보다 상상할 수 있도록 여지를 허락하는 배려도 그 이상의 힘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떤 모습으로 복원될지 궁금하다.
대견사지 옆으로는 남쪽을 향한 우람한 바위들이 겹쳐 있는데, 그 돌 틈에 열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다. 옛날부터 여기서 사람들이 기도를 드려왔고 그 들머리에는 마애불상이 새겨져 있다. 전체 모양이 '유가심인(瑜伽心印)'과 비슷한데 이는 으뜸 깨달음의 순간을 공(空)으로 표현하고 위로는 부처를 형상화하는 극락 만다라의 세계를 나타내는 밀교 문양이다. 여기 나오는 이 '유가'는 아래쪽 산자락에 있는 유가(瑜伽)사에서 한 번 더 확인되고 유가사가 포함돼있는 달성군 유가면에서 한 번 더 볼 수 있다. 유가는 인도에서 말하는 요가이며 요가는 마음 작용의 멈춤과 사라짐, 즉 열반을 뜻한다. 수련 방법으로 유가(요가)는 호흡을 조절함으로써 마음을 가다듬고 바른 이치에 걸맞은 상태에 이름을 일컫는다. 대견사지에서 비탈을 하나 올라가면 진달래 군락지가 나온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명소다. 30만평의 산이 봄이면 진달래로 붉게 물든다. 진달래 축제도 벌어진다. 대견사지에서 비슬산자연휴양림 쪽으로 걸어 내려오다 보면 바위들이 엄청나게 모여 있는 데를 지나게 된다. 여러 갈래 물길이 흘러내리는 듯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바위들이다. 비슬산 암괴류라 하는데 중생대 백악기에 만들어진 커다란 화강암들이다. 길이 2km, 너비 80m, 두께 5m. 바위 덩어리 하나가 지름 1∼2m여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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