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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사진

의성·안동·상주에서 만나는 돌탑의 세계 1

by 하얀 사랑 2013. 11. 12.

[의성·안동·상주에서 만나는 돌탑의 세계 1]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13-11-07

 

 

 

마치 둥근 그릇을 엎어 놓은듯한 인도의 복발형 탑은 불교 발생 이전부터 고대 인도에서 무덤으로 쓰였다. 이후 불교의 확산과 더불어 석가모니의 유골과 사리를 봉안하면서 불교 신앙의 대상물이 되고, 대승불교가 크게 일면서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 믿음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기 위한 신앙의례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불상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탑이 곧 신앙의 대상이었다.
탑의 모양이나 재료는 시대와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게 된다. 중국은 벽돌을 구울 수 있는 진흙이 많았기 때문에 전탑(塼塔)이 주류를 이루고, 화산 열도에 속하는 일본은 화산암의 재질상 전탑이나 석탑 제작이 어려워 자연 목탑이 많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불탑이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목탑이 중심이었지만, 안동·의성을 중심으로 일부에서는 전탑도 만들어졌다. 중국의 전탑과 일본의 목탑에 견줘 우리나라가 석탑을 중심으로 삼은 까닭은 질 좋은 화강암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석탑은 목탑이나 전탑보다 장점이 많다. 석탑은 오랜 세월 비바람에 버틸 수 있지만 목탑은 내구성이 짧았다. 전탑이 갖는 표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고 구조적 안정성이 높다는 장점도 있다. 탑이 지닌 여러 의미를 곱씹으면 돌탑 여행의 즐거움이 더욱 깊어지겠다.

 

 


- 탑리리 오층석탑과 조탑리 오층전탑
동네 이름마저 탑리 아니던가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국보 제77호)은 무심히 스쳐지나갈 수 있는 곳에 보석처럼 서 있다. 조그만 마을에 서 있는 이 탑이 국보란다. 동네 이름도 탑리다. 마을 전체가 탑을 받치는 기단 같은느낌이 든다. 중학교 교정 한켠에 들어선 이 오층석탑은 야트막한 1단 기단 위에 탑신을 5층으로 올렸다. 얼핏 보면 벽돌로 만든 전탑인 듯 여겨진다.

기단의 기둥돌과 탑신을 모두 별개의 돌로 짜 맞추고, 몸돌의 기둥돌들도 배흘림까지 다듬은 모습에서 백제탑 양식이 엿보인다. 지붕돌의 층급받침과 지붕이 모두 단을 이루고 있는 모양은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을 닮았다. 백제 석탑과 신라 전탑이 혼합된 양식이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과 함께 통일신라 전기 석탑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 작품이다.
안동 조탑리 오층전탑(보물 제57호)은 화강암과 벽돌을 섞어 만든 통일신라시대의 전탑이다. 우리나라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석탑이 주류다. 그런데 안동과 의성에 전탑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의 한 종파가 이곳에 전탑을 집중해서 유행시켰을 것이다, 벽돌 말고 다른 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조건 때문이다, 풍수지리설에따라 특정 시기에 벽돌로 만드는 전탑이 집중해서 축조되었을 것이다, 백제 쪽에서 장인들을 초청해 발달된 기술자들의 솜씨로 전탑이 축조되었을 것이라는 등 여러 견해가 나와 있다.
우리나라 전탑은 대부분 화강암을 함께 쓰고 있다. 돌로 된 1층 몸돌 남면에는 감실을 파고 좌우에 인왕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2층 이상 탑신에서 2층과 4층 몸돌 남면에 형식적인 감실이 있고, 지붕돌에는 안동의 다른전탑들과는 달리 기와가 없다. 1층 지붕부터는 벽돌로 쌓았는데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벽돌에는 문양이 남아 있다. 1층 몸돌의 높이가 지나치게 높고 5층 몸돌이 너무 커서 부조화스러운 까닭은 보수를 거치면서 원형이 많이 손상됐기 때문이겠다. 감실을 지키는 인왕상의 퉁방울 눈이 웃음을 짓게 한다.

 

 


-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안동 운흥동 오층전탑
벽돌로 만든 전탑의 묘미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국보 제16호)은 통일신라시대 절간인 법흥사에 있던 탑으로 짐작되지만 둘레에 민가와 철도가 들어서 있어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1층 기단에 7층탑신을 안정되게 쌓아 올렸다. 이칠층전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데, 이는 전탑 일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탑이 숭배의 대상이므로 아무래도 커다랗게 쌓아야 더욱 위엄이 있다고 여긴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전탑은 사람들에게 매우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몸돌의 각 층은 무늬가 없는 진한회색 벽돌을 쌓아 올렸다. 지붕돌은 위아래 모두 계단 모양으로 층단을 이루는 일반적인 전탑 양식과는 달리, 윗면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 기와를 얹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전탑이 목탑을 모방해 만들어졌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아울러 탑머리는 금동제 귀금속으로 장식돼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안동 운흥동 오층전탑(보물 제56호)은 옛 기록인 <동국여지승람>과 <영가지(永嘉誌)>에 7층 전탑으로 기록되어 있다. 1608년 편찬된 안동 읍지인 <영가지>에 따르면, 운흥동 오층전탑은 원래는 7층이었고 탑머리 장식이 금동제였는데 ,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인들이 훔쳐가면서 무너져 선조 31년(1598 )에 5층으로 새로 쌓았다. 당시 이곳에 법림사(法林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절터가 안동역으로 들어가 버렸다. 당간지주도 나란히 있다.
이 두 탑은 그러므로 공통점이 많다. 둘 다 벽돌로 만든 전탑이고 7층이며 머리 장식이 금동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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