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린내골 산행기
| ||||
산행일자 : 2011.6.4~6.5
비린내골 비린내골은 비가 많이 오는 계절이면 계곡 전체가 푸른 이끼로 덮혀 장관을 이룬다 하여 이번 산행의 주 테마인 이끼산행의 목적지로 선정되었다. 3일간 연휴인 관계로 1박2일의 일정으로 지리산 산행코스 중에서도 비교적 짧은 관계로 비린내골 ~ 벽소령 ~ 광대골로 이어지는 코스를 하루 하고 심원마을에서 숙박을, 다음날 새벽 만복대 일출을 보고 하산 아침식사 후 날씨를 보아가며 심원마을에서 노고단 능선 최단 코스로 오르던지 아니면 다른 코스를 가던지 결정하기로 하고 비린내골 산행을 나섰다. 비린내골은 함양 마천의 광대골 초입에서 벽소령으로 곧장 올라가는 골짜기다. 비가 오면 이끼가 많이 끼어 비린내가 난다하여 비린내골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하동 의신마을에서 함양 마천으로 소금팔러 다니던 소금장사치들이 생선저린 소금을 많이 버린데서 비린내가 유래되었다거나, 이 골짜기에 제비가 많이 날아왔다는 의미의 飛燕來 유래설, 바로 이웃에 위치한 광대골에 비추어보아 이 골짜기에서 사당패들의 판소리 흥보가 "제비놀러 나온다" 등을 불렀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둥 여러가지 雜說들이 난무한데, 언어란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 정해진 것이 없으니 제 맘대로 생각해도 사는데 별 지장은 없을 것 같다. 산행초입은 광대골입구다. 좌측 계곡이 비린내골이고 우측 계곡인 광대골에는 산림청에서 운영하는 자연휴양림이 있어 자연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삼정 중 양정마을 가기 전 좌측으로 빠지면 광대골이다. 비린내골은 비가 많은 계절이면 산행초입부터 정상부 인근까지 이끼가 쭉 이어져 바위가 매우 미끄럽다고 한다. 올해는 아직까지 비가 많지 않아서리 그런지 이끼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덜 피었다고 하는데, 그렇지만 대성골이나 뱀사골의 이끼폭포에 비교하면 훨씬 풍성하다. 전체가 통바위로 이루어진 듯한 비린내골의 계곡은 가문 탓인지 아직까지는 이끼가 덜 피고 수량이 다소 적어 아쉽기는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한 원시계곡의 절경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는 즐거움이 있다. 이끼가 많이 피면 미끄러워 산행하기가 까다롭다고 한다. 비린내 폭포 이끼계곡을 거의 지나 능선으로 올라서니 길이 가파르고 험하다. 벽소령 작전도로는 1969~1972년사이에 공비들의 은신처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요즘은 이 도로를 따라서 산행하는 산꾼들도 더러 있는 듯 하다. 여기서 점심을 먹고 1시까지 오침을 즐기다. 앞쪽 고개가 안당재, 뒷쪽 고개가 뒷당재 그리고 덕평봉 아래가 바른재(또는 곧은재)인데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다. 3개의 재가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벽소령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약 45㎞에 이르는 지리산 종주 등산코스의 중간 지점에 해당되는 고개로, 높이 1,350m이다. 옛날에는 함양의 마천과 하동의 화개를 이어주던 교통로였다. 벽소령을 기점으로 서쪽으로는 형제봉-명선봉-토끼봉-삼도봉(날나리봉)-일걸령-노고단이, 동쪽으로는 덕평봉~영신봉~촛대봉-연하봉~제석봉-천왕봉 등의 지리산 주봉우리가 이어진다. 당초 벽소령에서 1박할 예정으로 예약을 시도했으나 연휴인지라 예약이 불가능 했다. 국립공원 대피소 예약은 숙박 열흘 전날 10시부터 인터넷으로만 예약이 가능하며, 휴일예약은 대체로 어려운 편이다. 우리도 열흘 전 10시 정각에 4명이 동시에 접속을 시도했으나 전국의 산꾼들이 일시에 접속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산행계획을 바꿔 숙박을 심원마을로 정했다. 해발 1,350m의 지리산 능선의 대피소에 22.9이 들어와 있다. 한전 대단한 회사다. 벽소령의 미나리아재비 얼마전 통도사 서운암에서 전국 시인들이 꽃을 주제로 시 낭송 및 전시회를 연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구경갔다가 모 교수가 앞에서 시 하나 쯤 외워가라며 읊어 준 고은 선생의 꽃 詩 한 수 내려가다 보았네 미나리아재비는 여느 우리 꽃과 마찬가지로 길섶에 두루두루 피기 때문에 별 관심 없이 지나치지만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살펴보면 제법 예쁘다. 투구꽃 애기똥풀 등과 마찬가지로 독초다. 꺽어서 흰즙이 나는 풀은 대개 먹어도 되지만 노란 즙이 나는풀은 독초라고 한다. 요즘 고속도로변이나 큰 길가에 눈요기감으로 많이 심는 화려한 꽃들은 우선 보기에 좋지만 은근한 맛이 없고 꽃송이가 크고 지나치게 울긋불긋하여 마치 분칠한 여인네의 향내를 풍기는 반면, 이 땅의 토종꽃들은 단아하고 수수하여 눈길을 끌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아 마치 '예쁠 것도 없는 발벗은 아내' 같다. 요모조모 뜯어보면 정이 더욱 깊어진다. 이재구는 나의 그런 생각이 편견 아니냐고 반문하지만 이름조차 외우기도 어려운 외래종 꽃들보다 제비꽃, 동자꽃, 애기똥풀, 미나리아재비, 며느리밥풀 홀아비꽃대, 바람꽃 등 고향스런 이름에 마음이 가는 것은 당연지사다. 하산길 : 벽소령 → 음정마을방향 → 작전도로 → 계곡 → 알탕 → 광대골 자연휴양림 다시 하산길도 계곡으로...
광대골 휴양림에서 바라보는 형제봉. 양쪽 바위 중 오른쪽으로 보이는 바위가 부자바위다. 형제봉은 옛날지도에는 父子바위로 되어 있고 마천의 하정사람들은 아직도 부자바위로 부른다고 한다. 그 연유는 선녀와 나뭇꾼에 나오는 이야기와 비슷한데 "옛날옛날 한 옛날에 물 좋은 지리산 이 골짜기에서 오붓하게 알탕하러 왔던 선녀가 나뭇꾼 총각에게 옷을 슬쩍당하고 우짤 수 없이 두 아들까지 낳고 살았다. 그러나 지리산 함양하고도 마천하고도 하정골짜기의 촌넘 나뭇꾼의 살아온 환경과 생활수준, 문화와 기타 등등 모든 것이 하늘나라 출신인 仙女 자신과는 도저히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선녀는 우울증마저 앓던 중 호시탐탐 탈출기회를 엿보다 나뭇꾼이 방심한 틈을 타 숨겨놓은 옷 챙겨입고 하늘나라로 잠적해 버렸다. 창졸간에 홀아비가 된 나뭇꾼과 그 두 아들이 산 꼭대기 올라 울고불고 몸서리치다 지쳐 끝내 망부석이 되었다."[내맘대로 각색] 라는 듣기에도 술고픈 전설이 얽혀있는 父子바위다. 근데 금강산의 선녀는 애들은 데리고 되돌아 갔던데 지리산 선녀는 뭥미? 금대암 금대암 앞 전나무. 25m높이의 키가 우뚝한 경상남도 기념물 제212호다. 나이는 대략 500년 정도 된다고. 진재眞宰 김윤겸 金允謙, 1711~1775]이란 조선시대 문인화가가 그린 '금대암'에서 본 지리산 [金臺對智異全面 ] 지리산의 실경을 간결한 선과 점으로 짜임새있게 묘사했다. 김윤겸은 조선의 진경산수 원조인 겸재 정선의 문하로서 몰운대 태종대 해인사 등 영남기행화첩을 남긴 실경산수를 많이 그린 사람이다. 위 그림에 대한 이재구차장의 부연 해설을 곁들인다. "금대암 에서 본 지리산"이라기 보다는 "금대에서 본 지리산"이 정확하겠지요. 아, 물론 작가 나름의 풍경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18세기 진경산수화는 일단 실경에 충실한 거니까... 금대암에서 보면 백무동 일부가 저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focus를 백무동에다 맞추면 천왕봉은 안 나타나게 됨) 천왕봉을 배제하고 "지리전면도"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 같으니까... 물론 금대와 금대암을 구분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일단은 충실하게 해석하는 게 좋을 듯...
이 작품에 이 정도의 안목으로 해설할 수 있는 인물은 '이재구'뿐이다. 하산하여 심원마을 숙소에서 닭백숙 한 마리 시켜놓고 이 집에서 담근 술 몇 주전자를 비웠다. 술 이름이 음양곽이라나? 음양곽은 삼지구엽초로 담근 술이라 한다.
새벽 만복대로 아직 사방이 캄캄하여 후래쉬를 켜들고 슬금슬금 오르니 새벽에 장닭이 울듯 새들도 울기 시작한다. 새들이 일찍 일어나 우는 것은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배가 고파 운다. 새는 창자가 짧아 위장 속에 먹이가 오래 보관되지 않는다. 따라서 먹고 싸고, 날아가다가도 싸고, 앉아서도 싼다. 한 밤을 지냈으니 주린배에 울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흔히들 얼리버드가 벌레를 먼저 잡는다고 다 잡는데 말짱 거짓말이다. 헝거리버드가 벌레를 잡는다.
유월 새벽의 산바람은 선선하게 분다.
"반야엉덩이에 구름만 가렸다." 다시 노고단으로 심원마을에 돌아와 아침을 먹고 다시 노고단으로 오르기로 했다. 심원마을 대소골 입구에서 능선을 타고 직접 노고단으로 오르는 코스는 4시간 정도 소요되며 8시쯤 출발하여 12까지는 돌아올 수 있을 것이란다. 초입에서 노고단으로 오르는 코스는 인적이 끊어진지 오래 되었는지 길 흔적이 희미하고 가파르다. 어제의 산행, 저녁의 음주, 새벽의 만복대 산행으로 몸이 지쳐 힘이 든다. 송건주는 아예 포기하고, 앞서 걷던 한영택은 엇저녁의 과음 탓인지 중도에서 포기 되돌아 가고, 이재구는 횡하니 사라지고 없다. 그는 짐승이다.
짐승, 곰을 만나다 이재구는 "함 붙어도 지지는 않겠더라"며 뻥을 친다. 이 코스는 너무 힘들다. 그럼에도 이재구는 벌써 노고단 턱밑에 가서 노고단
노고단에서 본 반야 엉덩이. 반야봉과 중봉은 만복대에서, 노고단에서, 덕평봉에서, 천왕봉에서 봐도 신기하게도 엉덩이 두 쪽같이 생겼다. 종석대 철쭉 그늘 뒤 원추리밭 앉아 한 숨 돌리고 간식도 먹고, 사진을 찍고 노닥거리다 다시 심원마을로 돌아간다. 왔던 비탈길 도로 내려 가는 것도 산죽 헤치며 가자니 힘겨운데 이재구는 벌써 어데가고 보이지도 않는다.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산 산허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한 때 빨치산이 즐겨 부르던 노래라 하여 금지당했던 '부용산'이란 노래다. 박기동이란 이가 시를 썼고 안성현이란 이가 곡을 붙인 것인데 그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1941년 18세 때 박기동의 누이동생이 벌교로 시집을 갔고 24세 때 죽었다고 한다. 당시 30세이던 박 교사는 벌교의 부용산에 장사지내고 돌아와 「부용산」이라는 시를 썼다고 했다. 이듬해인 1948년 박 교사는 목포의 항도여중으로 초빙되어 갔고 여기서 안성현이라는 음악교사를 처음 만나게 된다. 이때 항도여중 3학년에 김정희라는 학생이 경성사범에서 전학해 왔었는데 특히 문예 방면에 소질이 뛰어난 천재소녀였다. 그러나 그 해에 이 아까운 소녀는 폐결핵으로 죽고 만다. 「부용산」은 노래를 잘하던 항도여중의 배금순이라는 학생이 처음 불렀고 금방 전남 일대로 유행해 나갔다고 한다. 우리가 잘아는 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는 시에 곡을 붙인 이가 안성현이라고 하는데 월북을 해버렸고, 박기동 시인은 1993년 호주로 이민을 가버렸다고 한다. 그 때문에 전혀 사상성이 없는 노래이면서도 빨치산들이 불렀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금지곡으로 묶이고 잊혀진 노래로 되어버렸던 것이다. 1997년 안치환이 구전가요로 전해지던 것을 음반으로 취입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2절은 국내 문인들의 요청에 의해 박기동시인이 1998년에 지었기 때문에 안치환의 노래에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