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자 : 2008.8.9(토)
산 행 지 : 영남알프스 지룡산
산행코스 : 운문사 주차장 ~ 지룡산 ~ 배넘이재~ 심심이계곡 ~ 사리암주차장 ~ 운문사 ~ 주차장
산행인원 : 18명
이번 산행은 웅비를 위해 발톱을 곧추세우고 있는 龍의 머리 와 등 그리고 꼬리에 해당하는 배넘이재를 타고 넘어 가지산의 깊은 골짜기인 학심이 계곡 아래를 지나 운문산의 시원한 바람소리에 날으는 새도 발담그고 간다는 심심이계곡까지 가서 몸한번 담�다가 운문사를 거쳐 원점회귀하는 코스로 정하였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虎踞山은 운문산에서 뻗은 지맥이 범이 웅크리고 있는 형국을, 地龍山은 가지산에서 뻗은 지맥이 웅비를 준비중인 용의 형국을 하고 있다고 말함이 옳을 듯한데. 배산임수를 기준으로 볼 때 운문사을 중심으로 좌측 산의 지맥은 호거산이고 우측 산의 지맥은 지룡산이다. 풍수지리에서 이야기하는 좌청룡 우백호의 형세와 반대다.
지룡산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 관련하여 견훤이 지렁이의 아들로서 신라와 대항하기 위해 이 곳에 산성을 쌓았다는 그럴듯한 이야기들이 있는 것 같지만 (地龍 : '지렁이'가 '지룡이'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 역사에서 패자는 간혹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되니 야담으로 치고... 삼국유사에 보양국사와 서해 용의 아들(璃目)의 이야기가 지명의 유래가 아닌가 한다. 이목은 곧 '이무기'가 아닌가? 이무기의 이두식 표기가 이목(璃目)일 수도 있고...
범이 웅크리고 있고, 용이 웅비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말은 와호장룡(臥虎藏龍 : 움크린 호랑이와 숨은 용)이란 말과 흡사한데, 주윤발과 장쯔이 주연의 무협영화 와호장룡이 그것이다. 중국영화로서는 할리우드에서 대단한 흥행을 기록했고 아카데미 4개부분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전의 중국 영화답지않게 깔끔하고 주윤발 장쯔이 양자경의 빼어난 연기가 일품이었다. 백무백(주윤발)은 臥虎, 소룡(장쯔이 분)은 藏龍인데, 대나무숲으로 유명한 황산의 비천곡에서 촬영했다 한다.
운문사 계곡의 와호장룡은 누구일까?
운문사 주차장의 산행초입. 초입부터 급경사면을 타고 오른다
한숨 돌리고 바라본 전경
멀리 좌측 봉우리 운문산과 구름에 가린 억산. 그 아래 천문지골
호거대. 호랑이가 움크리고 있는 기세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운문사 주차장
지룡산. 배넘이재로 가기위해서는 표지석 뒷편으로 내려 가야한다.
멀리 오른편 억산이 얼굴을 내밀었다. 영남알프스의 山群들은 峰峰마다 위용을 잘 보여준다.
조용한 산사에서 들려오는 독경소리에 발걸음이 편안했다.
지룡산성의 옛 성벽. 삼국시대인지 아니면 그 이후인지 몰라도 이 산길따라 성벽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야사에는 후삼국시대 견훤이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축조했다는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다.
아름다운 절집 雲門寺.
운문사는 비구니스님들의 절집이다. 운문사의 새벽예불을 비디오로 본 적이 있었는데 통도사나 화엄사의 장엄한 저녁예불과는 달리 청아하고 맑았다. 한번 와서 보리라 맘 먹었지만 아직 실천을 못했다.
어~ 그런데 더 와서 보니 건물의 배치가 어긋나 있다.
통도사의 일주문 불이문 대웅전 가는 가람의 배치, 범어사의 일주문에서 불이문 지나는 건물의 배치도 틀어놓았다.
호거산 운문사. 대웅보전이 남쪽으로 앉아 있어 좌측으로 지룡산, 우측으로 호거산을 끼고 있는 묘한 좌청룡 우백호의 풍수형상을 하고 있다. 배산임수의 기준으로하자면 우청룡 좌백호의 형상이 된다.
용이 꿈틀대는 모양의 산세. 용머리 모양이 지룡산이다.
박부장이 찍으라던 저 구름 머무름 없듯이 우리네 인생도 머물 곳 없네
산부추(일명 산정구지) 군락. 산부추가 군락을 이룬 것은 처음 보았다.
花看半開! 꽃은 반쯤 피었을 때 보고 술은 약간 취했을 때 그쳐야 한다. 활짜기 핀 꽃은 곧 시들 것이요...흠뻑 취하면 다음날 일하는데 지장만 있다.....
헬기장. 지룡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데 산이름은 없다. 지룡산이 용의 머리부분이니 이 곳에 이름을 붙이면 용의 허리를 끊는 것이 되어 이름없이 그냥 둔 듯하다.
배넘이재에서 학심이 가는 길 옆의 배바위. 원래 저 아래 있었는데 어느새 여기까지 와 있다고...아마 몇십년 후면 저 배너미재를 넘어 가 있을 거라고 누군가 농담을 한다.
가지산 북릉 계곡물이 심심이 계곡물과 만나는 곳. 이 곳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가장 짧은 코스로 한시간반이상의 산행을 해야 하므로 평소에는 인적이 드물다. 하여 계곡이 깊고 물이 맑으며 숲은 원시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
심심이계곡
任間松韻 숲을 스쳐가는 솔바람 소리와
石上泉聲 돌사이를 흐르는 샘물소리도
靜裡聽來 고요한 가운데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識天地自然鳴佩 자연이 연주하는 음악처럼 들려오고
草際煙光 풀섶의 안개빛과
水心雲影 물위에 비치는 구름그림자도
閑中觀去 한가하게 보고가노라면
見乾坤最上文章 자연이 그린 최고의 문장처럼 느껴진다
- 채근담 -
雲門寺
일연스님이 1277년(고려 충열왕3년) 운문사 주지로 와서 우리 역사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인 삼국유사를 지은 곳이다.
'운문사사적'에 의하면, 557년(진흥왕 18년)에 한 신승(神僧)이 북대암 옆 금수동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여 도를 깨닫고 도우(道友) 10여 인의 도움을 받아 7년 동안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 남쪽에 천문갑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를 창건하였으나 현재 남아 있는 곳은 운문사와 대비사 뿐이다.
그후 600년(신라 진평왕22년) 원광 국사가 중창하였다. 그는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점찰법회를 열고, 화랑도인 추항( 項)과 귀산(貴山)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내려줌으로써 화랑정신의 발원지가 되었다. 오갑사가 창건된 시기는 신라가 불교를 중흥하고 삼국통일을 위해 국력을 집중하여 군비를 정비할 때였다. 이때 오갑사가 운문산 일대에 창건되고 화랑수련장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곧 신라가 서남일대 낙동강 유역으로 국력을 신장해 가는 과정으로써 운문사 일대가 병참기지로서 당시 신라로서는 전략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보양이목조에는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태조왕건은 운문사에 있던 보양국사의 계책으로 이 일대를 평정하였다. 그 뒤 후삼국의 사회적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한 왕건은 937년(태조 20년), 대작갑사에 '운문선사'라는 사액과 함께 전지 500결을 하사하였다." 고 한다. 이 때부터 대작갑사는 운문사로 개칭되었고,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구축한 대찰로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1977에서 98년까지 명성스님이 주지로 있으면서 대웅보전(大雄寶殿)과 범종루(梵鐘樓), 각 전각(殿閣)을 신축·중수하여 현재는 30여 동의 전각이 있는 큰 사찰로서 규모를 갖추었다. 1958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었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개칭되어 승려 교육과 경전 연구기관으로 수많은 수도승을 배출하고 있다. 1997년 비구니 강사를 양성하는 전문 교육기관으로는 최초로 승가대학원이 개설되었다.
현재 대략 260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이곳에서 경학을 수학하고, 계율을 수지봉행하고 있으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 청규를 철저히 실천하고 있다.
운문승가대학은 국내 승가대학 가운데 최대의 규모와 학인 수를 자랑하고 있다
운문산 돌담길과 지룡산
호거산 운문사 범종루. 절집의 출입문인데도 절의 정면이 아닌 옆구리쪽으로 나 있다.
운문사의 쳐진 소나무. 매년 4월과 9월에 막걸리를 몇말씩 마신다고 한다.
만세루를 통해서 본 대웅보전. 새로 중창된 것이다.
대웅보전 건물이 하나 더 있다. 한 절집에 2개의 대웅전이 있다.
대웅(보)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집이다. 그런데 안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이 계신다. 비로자나불은 '우주본체' 또는 진리(法) 그 자체를 형상화한 것이라하여 法身佛이라고 하며 大寂光殿 또는 비로전에 모신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유교수가 자기네 반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이 대웅보전에 대하여 설명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샌님여, 운문사 대웅보전에 모셔진 불상은 비로자나불 맞지예?"
"그렇지,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으니 비로자나불이지."
"그란데 와 대웅보전이라 캅니까? 대웅보전은 석가모니 모셔진다고 안했습니까?"
"그러니까 우습지. 조선후기 들어서면 중들이 계율보다 참선을 중시한다고 불가의 율법을 등한시 했어요. 그 바람에 저렇게 잘못된 것이 많아요. 굳이 해석한다면 본래는 석가모니 집인데 비로자나불이 전세 살고 있는 것이라고나 해야 될까보다."
나는 운문사 대웅보전에 왜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유래를 잘 알지 못하지만 이른바 유홍준교수와 같은 일부 지식인들이 자신의 지식만이 올바르고 자신과 다른 견해나 행위에 대해서 아무렇게나 폄하하거나 지식과 행동이 매우 다른 것에 대해 냉소를 보낸다.
아무리 조선후기 불교가 억압받던 시대라 하더라도 운문사와 같은 대가람의 절집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 집의 대문에 거는 현판 이름도 몰랐을 것이라고 비하하여 주장한 점이 하나이며, 일부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禪佛敎에 대한 이해없이 마음대로 폄하하는 것이 두번째며, 출가한 비구니 학승에 대해 대해 '사연 있는 여자' 운운 한 점이 세번째며, 더구나 운문사 대웅보전을 새로 지어 잘못된 현판을 '비로전'으로 바꾸고자 하였을 때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웅보전'이 보물이기 때문에 현판을 손댈 수 없다며 문화재청이 허가하지 않았는데, 유교수는 문화재청장을 지냈음에도 어떤 노력을 하였는지 알려진 바 없음이 네번째다.
유홍준교수는 또한 문경의 봉암사에 가서도 주지스님에게 '그런 중'이니 하며 글로서 행패를 부린 일이 그의 문화유산답사기1권에 기록되어 있는데, 유교수가 어렵사리 주지스님을 난나서 지증대사비를 봉암사 안내기에 전재해 줄 것을 요청했다가 주지스님이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네요. 여긴 참선 도량이기 때문에 스님들이 도 닦는 것이 더 중요해요. 그런 글 읽고 싶은 사람은 다른 책을 보면 다 나와요."라고 했다고 신발을 질질 끌고 나와 '그런 중'한테 절까지 하다니 하며 억울해 했다고 푸념한 것도 있다.
문경 봉암사는 한국최고의 참선도량으로서 일년에 단 한번 초파일 말고는 일반신도들도 출입도 금지하는 곳이다. 출가한 스님에게 안내문 따위가 뭐 중요할까?
그나저나 운문사의 비로자나불께서는 대한민국의 공무원이 변치 않으면 셋방살이를 영원히 면치 못할 것같다.
운문사 구.대웅보전의 비로자나불. 지권인을 하고 있는대 왼손 집게손가락을 펴 세워서 위쪽 오른손 주먹 속에 넣는다. 이때 오른손은 법계를 뜻하고 왼손은 중생을 뜻하여, 법으로써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 부처와 중생은 같은 것이며, 미혹과 깨달음도 본래는 하나라는 뜻이기도 하다.
대웅보전(비로전) 안의 반야용선에 매달린 해학스런 악착보살. 이번 생에 악착같이 기어코 성불하고 말겠다는 원을 세운 보살이라 한다. 반야용선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중생들을 실어나르는 배다.
운문사 삼층석탑
운문사 작갑전
학승들에 대한 교육장인 만세루
法輪은 부처님의 교법이 수레가 굴러가듯 머물지 않고 항상 전하여 지는 것을 의미한다. 8개의 바퀴살은 八正道를 상징하며 正見, 正思惟,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을 상징한다.
아랫단은 부처님 최초의 설법지인 녹야원에서 5비구에게 설하는 모습인이다.
이로서 佛 法 僧의 三寶가 이루어 진 것을 상징하는 初轉法輪相(초전법륜상)이다.
운문사에서 주차장으로 나가는 숲길
운문사 주차장 입구의 소나무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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