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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모음

작은세개골(칠선봉)

by 하얀 사랑 2011. 11. 17.

지리산 칠선봉과 원대성마을
[염기훈 2011/11/07 08:54 / 조회수:592 / 추천:5]

 

   산행일자 : 2011.10. 30(토)
  산행인원 : 3명 (이재구 한영택 염기훈)
  산행코스 : 의신마을 ~원대성마을~작은세개골~칠선봉~칠선남릉~원통암~의신마을

  지리산 가을과는 인연이 없는지 몇 년째 제대로 된 지리산 단풍 맛을 느낄 기회가 없었는데, 11월 첫째 주로 예정된 산행계획을 일주일 앞당겨 단풍산행을 하기로 했다.  이대장의 말마따나 " 단풍의 끝자락, 수수한 황갈색 키큰 잡목숲 사이로 걸을 때 붉고 노랗게 물든 키작은 나무 이파리들 사이로 햇살이 비치는 황홀한 풍경을 볼 수 있으려나?"하는 기대반의 희망을 안고 의신의 지리산 역사관에 도착하니 아침 7:45분, 곧장 대성계곡으로 향한다. 이번 산행은 의신에서 출발하여 대성계곡을 거쳐 작은세개골과 칠선봉으로 올라 칠선남릉을 타고 내려와 원통암 방향으로 하산하는 것이다.  대성마을은 2009.7월 첫주 큰세개골 대성폭포 영신대로 해서 다녀온 기억이 생생한데 벌써 2년이 넘었다.   

  晩秋의 대성골
  의신에서 한시간 반 정도 올라간 대성골은 울긋불긋 가을 옷으로 갈아입었다. 대성마을에는 원통굴圓通屈이라는 당호堂號를 붙인 개인이 수행하기 위해 지은 집과  조금 떨어져 민박 치는 2가구가 마을을 이루고 있고 이곳까지 전기가 들어오고 있다. 원통굴에는 집주인인듯 한 사람이 우리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와본다. 큰 바위 아래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맑다. "물 한잔 하고 가십시오"하고 친절을 베푼다. 민박집에는 산행팀 일행이 아침밥을 먹고 있고, 시월의 막바지에 들어선 산중임에도 날씨는 포근하다.  

 대성마을에서 다시 한 시간여 큰세개골로 가기전에 좌측 원대성마을로 빠진다. 원대성에는 과거 여러 가구가 살았던 집터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있지만 지금은 두 가구의 집만 있고 전기는 들어오지 않는다. 어귀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노란 은행나무가 눈에 들어오는데 잎이 너무 고와 눈이 부시다. 사람의 인기척은 없는데  배추와 푸성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남새밭으로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배추 등 푸성귀 농사를 잘 지었다. 나도 주말 농사를 7년째 하고 있지만 배추는 모종을 이식하고 초기에 물만 잘 주면 농약이나 비료 등 일체의 화학제품을 사용하지 않아도 병충해를 잘 이겨낸다. 간혹 진딧물이 붙으면 우유를 물에 희석해서 뿌려주면 진뒷물이 질식사한다. 퇴비는 만들어 사용하는데 쌀겨와 잘게 부순 깻묵을 섞어가며 물을 살살 뿌려 잘 혼합하여 2주일 정도 덮어두면 열이 나고 발효가 되는데 산의 낙엽(부엽토) 등을 썩어주면 미생물 발효가 더 잘된다. 주말농사 서른 평 정도면 유기농 농사로 봄부터 가을까지 푸성귀 가득한 식탁을 차릴 수 있다.

  배추는 서늘한 기온에 잘 자라기 때문에 태백 삼척 강릉 등 백두대간 해발 천 미터가 높는 고지대에 고랭지 배추를 많이 심는다. 그러나 집단재배하는 곳은 열 번 약을 쳐야 배추 한 포기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병이 심하다고 한다.  현재도 시골에는 젊은 이가 없어 등 굽은 노인네들만이 시골을 지키고 있고 쌀을 제외한 식량자급율은 26%밖에 안되는 상황에서  FTA가 발효되면 외국의 싸구려 수입농산물이 우리 농촌을 초토화 시킬 것은 뻔한데 그런 농산물 자체가 GMO(유전자변형 농산물)이거나 농약에 의존하는 대량생산품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도시의 옥상이든 농촌에서든 자급자족하는 소농을 확대하는 것 외에는 별로 답이 없다고 전문가들이 말하는 것이다.  

    "올해는 단풍이 전만 못해요"
    "죄송합니다, 잠시 지나가겠습니다"라는 말에 돌아온 아주머니의 대답이다.
    아주머니는 또 무엇을 발견한 듯 집안의 남편쪽으로 큰 소리로  
    "여기 보세요, 얘가 새로 나오네요"  
    아마 싹이 나는 것을 발견한 모양이다.

  버몬트 숲의 헬렌과 스코트니어링의 삶과 원대성마을    
  미국 이야기지만 시골살이의 정신적 가치를 일깨워주는 것으로서 귀농하려는 사람들에게 교과서 같은 책이 있다. 1932년 뉴욕에서 버몬트 시골로 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단순하게 살아간 헬렌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의 이야기를 담은 '조화로운 삶'이다. 

  요즘 귀농을 하려는 사람들은 대개 낭만이 넘치는 전원생활을 꿈꾸며 귀농하려는 분들이 많은데 귀농하기 위해서는  '왜 시골로 가야하는지,  어떤 것이 조화로운 삶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농사는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무엇을 먹을 것인지,  살림은 어떻게 꾸릴 것인지, 누구와 함께 살것인지'  이런 것에 대한 충분한 가치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조화로운 삶은] 헬렌과 스코트 니어링이 버몬트 숲 속에서 스무해 동안 살면서 산 삶을 기록한 것으로서,  단순하면서도 충족된 삶, 그것이 그이들이 평생토록 추구한 삶이었다. 스코트 니어링는 백살이라는 나이로 스스로 음식을 끊으므로써 생을 마감했다.  

   '채식주의를 지킨다. 
   하루를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빵을 벌기 위한 노동은 하루에 반나절만 하고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쓴다.
   한해의 양식이 마련면 더 이상 일하지 않는다.
   방문객이 찾아와도 밭에 나가 일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누구든 자기가 먹은 그릇은 설거지 하게 한다.
   집짐승은 기르지 않는다. (시간도 빼앗기지만 일종의 착취로 본다)
   은행에서 절대로 돈을 빌리지 않는다. 
   할 수 있다면 모든 먹거리는 자급자족하며, 농사지을 수 없는 생필품은 농작물과 맞바꾼다.
   기계에 의하지 않으며, 할 수 있는 한 손일을 한다.
   하루에 한 번씩 철학, 삶과 죽음, 명상에 관심을 갖는다.  

   원대성마을에 사는 분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지만, 산중 천 고지가 넘는 전기도 없는 곳에서 소박한 삶을 꾸려 가는 점에서 헬렌과 스코트니어링의 버몬트 숲과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은 것 같다. 자연 속에서 땅을 의지하고 나무를 친구삼고 바람을 벗으로 느끼며 자급하는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선택이라는 점에서 자기 삶에 대한 진지하고 확고한 철학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외로움? 뭐 세상 속에 있다고 외롭지 않은 사람 있는가?    

   원대성마을 뒷편으로 조금 올라 능선 오른편으로 빠지니 작은세개골이다.  계곡을 거슬러 오르기 전에 이대장은 배낭을 벗어 놓고 잠시 가 볼 곳이 있으니 내려가잔다. 작은세개골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4단폭포다. 어제 비가 좀 와서 폭포에 물이 제법 흐른다.  큰세개골의 대성폭포와는 또 다른 맛으로 다가온다.    

 덕평봉의 선비샘으로 오르는 갈림계곡에서도 조그만 폭포가 흐른다.   

   水流花開 落花流水 물 흐르고 꽃 피며, 꽃 져도 물 흐른다. 자연의 가장 극명한 이치다.  

 

    대성계곡의 작은세개골은 칠선봉에 연결되는데  반대편 큰새골로 곧장 이어져 백무동으로 내려서게 된다. 그러니까 칠선봉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큰세개골 작은세개골, 북쪽으로 큰새골 작은새골이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산사태가 났는지 계곡이 어지럽다.    

  작은세개골. 빤히 올려다 보이는데도 멀다. 더럽게...  
  "40분이면 가겠지"
  "뭐라! 한 시간 반이다"  

   칠선봉으로 오르는 계곡은 분위기가 천왕남릉 아래의 통신골 같다.  거의 다와 간다.  

  칠선봉 정상

  그리움으로 달려온 산정에는  
  꽃 떠난 계절의 빈바람 뿐 
  기다려 줄 이 없는 
 
 시간의 자리에
  나를 내려두고
  안개구름 흩어진 허공으로  
  하산을 서두른다 
     
  그 길따라  
  낮달이 맑게 운다                  

 

  칠선봉七仙峯. 칠선남릉에서 보니 지리 주능선에 7개의 봉우리가  우뚝하다.

  영신봉 창불대唱佛臺

  유두류록에는 김종직이 창불대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는데 "우뚝 솟은 바위여서 아래에는 끝이 보이지 않고 위로는 초목이 없다. 다만 철쭉 몇 떨기와 영양의 똥이 있을 뿐이다."  또 남해안과 섬진강을 바라보며 길 안내를 맡은 승려 이공이 "저기가 신흥사, 저곳이 청학사가 있는 동네입니다"하며 설명하자 "경상도 절도사 이극균이 호남의 도적 장영기와 이곳에서 싸웠다. 장영기는 좀도둑이다. 험한 지형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이공의 지혜와 용기로도 그가 도망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끝내 장흥군수의 공이 되고 말았다"라는 글이 나온다. 

   김종직이 지리산 산행기에 좀도둑에 관한 기록을 남긴 것이 궁금하여 찾아보니 조선왕조실록(예종 1년 1469년)에 무안 사람 어부출신인 장영기라는 도적이 무리를 지어 구례 하동 등 지리산 일대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하는데, 그 폐해가 너무 큰지라 임금이 교지를 내려 체포하도록 했다. 본거지가 지리산이었던지 화개골에서 쫒겨 무등산 쪽으로 도망가다가  전라도 절도사 허종과 장흥군수 김순신에게 붙잡혀 처형당하게 된다. 김종직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전라도 절도사(全羅道節度使) 허종(許琮)이 치계하기를,
 “적당들은 군사를 일으켜 도둑을 체포한다는 말을 듣고 경상도(慶尙道)로 도망하였으므로, 신이 경상우도 절도사(慶尙右道節度使)에게 이문(移文)하였고, 또 경상도의 접경인 구례(求禮)·남원(南原)·운봉(雲峰)·광양(光陽) 등의 고을에 군사를 모아서 체포하게 하였고, 또 도둑들이 본도로 향하여 돌아올까 염려하여 요로(要路)마다 복병(伏兵)시켜 대비하였습니다. 10월 17일에 창평현(昌平縣)에서 보고하기를, ‘어젯밤에 도둑 남녀 합하여 1백여 인이 옥과(玉果)로부터 와서, 방호소(防護所)의 갑사(甲士) 이진산(李進山) 등 5인을 죽이고, 정이하(鄭以下) 등 6인을 쏘아 맞히고, 곧 광주(光州)의 무등산(無等山)으로 향하였다.’ 하므로, 신이 선전관(宣傳官) 유오(柳塢)와 더불어 궁추(窮追)하여 적당을 덮쳐서 나주(羅州) 출신인 김대(金大) 등 6인을 잡았는데, 김대가 공초(供招)에 이르기를, ‘적당은 무안(務安) 사람 장영기(張永己) 등 25인이며, 처(妻)와 자녀(子女)를 합하여 총 42인인데, 이제 관군의 궁추로 형세가 절박하여 처자들을 버리고 도망하여 흩어졌다.’ 하므로, 신이 적들의 용모와 나이를 본도의 여러 고을과 타도(他道)에 이문하여 체포하게 하였으며, 또 적당이 배를 탈취하여 물을 건너서 해도(海島)로 도망하여 숨을까 염려하여 수군 절도사(水軍節度使)와 만호(萬戶)로 하여금 공선(公船)과 사선(私船)을 모아 바다에 띄워 대비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이들 적당은 사납고 무리를 이루어서 비단 사람을 많이 죽였을 뿐만 아니라 관군에 항거하였으니, 다른 강도에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청컨대, 적당을 안전하게 보호한 자와 정상을 알면서도 자수시키지 않은 자는 함께 강도의 와주(窩主)의 예(例)에 의하여 논죄하고, 관에 고하여 적당을 체포하게 하는 자는 강도를 체포한 사람의 상보다 등수를 높이어서 상을 주소서.”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 내리어 의논하게 하니, 승지(承旨) 등이 아뢰기를,
“도둑이 관군에게 맞서서 대적하는 것은 곧 반역(反逆)과 같으니, 연좌(緣坐)한 사람들도, 청컨대 율문(律文)에 의하여 구처(區處)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곧 전라도 관찰사와 절도사에게 치서하기를,
“강도들이 관군에게 맞선 것은 곧 반역과 같으니, 그에 호응한 자와 연좌한 자를 함께 가두라.”
하였다. 허종이 또 아뢰기를,
“구례 현감(求禮縣監) 박겸인(朴謙仁)이 군사를 일으켜 도둑을 체포하기 위하여 진주(晉州)의 화개현(花開縣)에 이르렀을 때, 도둑이 박겸인의 군사 5인을 쏘아 맞히고 2인을 베어 죽였는데, 박겸인이 두려워서 퇴군하고는 이 사실을 숨기고 보고를 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박겸인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마가목
  칠선남릉에 마가목 나무가 지천에 널려 있는데 대개  벼랑 끝이나 손이 닿지 않는 키큰 나무 끝에 열매가 달려 있어 채취하기가 쉽지않다. 마가목은 껍질과 열매를 약재로 쓰며 차로 마시기도 하는데 술에 담가 마시면 효능이 좋다고 하는데 만병통치약으로 통한다. (인터넷에 보니 콩팥기능 강화하고, 종기와 염증, 위염, 허리와 무릎이 쑤시고 아플 때, 기침, 기관지염, 폐결핵이 있을 때 약으로 처방한다고)

  작은세개골로 삼단폭포 위로 내려와 잠시 알탕을 하고 원통암으로 가기 위해 원대성마을 뒷능선을 다시 올랐다 잠시 알바

  바람없는 저녁 햇살 속에 만추를 맞은 숲은 먼저 물든 잎 내리는 일로 분주하다.   

  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已秋聲 
 
 "연못 앞 봄 풀은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는데, 섬돌앞 오동잎은 벌써 가을 소리가 낸다."했던가!  

  가고 옴이 하나의 일상이라는 것을 숲 속에서도 느끼지만 그래도 담담하거나 스산한 기분이 드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이 계절이다.    

  원통암 
  원통암까지 내려오니 날은 이미 저물어 어둠이 산길에 깔린다. 서산대사가 수행했다는 원통암 불꺼진 법당에는 녹음기 혼자 염불 수행정진하고 있고, 불켜진 쪽방 스님은 바깥의 소리에도 기척이 없다.  물 한 잔 마시고 후래쉬를 켜고 내려오니 의신마을은 적막에 잠겨있다.

  이번 산행은 원대성마을과 작은세계골의 삼단폭포 칠선봉과 칠선남릉의 가을 정취를 한껏 가슴에 담아오는 여정이었다.  지리산은 골짜기마다 사람사는 이야기가 담겨있고 그 사이사이로 역사가 흐른다. 알지 못하는 작은 골짜기와 능선 그 숨겨진 작은 원대성마을의 소박한 생활은 내가 꿈꾸는 삶이고, 유장한 지리산 능선의 뭇 봉우리 중 七仙의 七峯은 신선 세계를 동경한 인간의 이상향일 것이다.  하루 짬으로 유토피아를 여행할 수 있는 곳, 지리산은 그런 곳이다.        

  지리산 하동 구례 등의 남부 쪽을 산행하노라면 산행 후 뒷풀이는 대개 화개의 조양식당에서 돼지떡갈비로 하는데 이 집의 돼지떡갈비는 1차 구워내어 기름을 뺀 후 손님 상에서 2차로 굽기 때문에 맛이 삼삼하여 좋다. 산행 안내 뿐만 아니라 운전까지 도맡아 하는 이대장은 "매일 마시는 술, 오늘 하루 쉴 수 있으니 얼마나 좋노" 하며  좋아하는 술대신 물만 홀짝인다. 덕분에 돌아오는 차안에서 이대장은 운전하고 나머지는 졸다 깨다를 몇 번 하고나면 된다.  수고하는 이가 있어 편안한 넘들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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