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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및 기타산

용문석굴과 숭산 기행

by 하얀 사랑 2012. 11. 28.

중국기행 2, 용문석굴과 숭산 소림사
[염기훈 2012/11/28 15:09]

 

 

 

 

 

 

 

 

 

 

 

 

 

 

 

 

 

 

 

 

 

 

 

 

 

 

 

   용문석굴은 둔황의 막고굴(莫高窟), 대동의 운강석굴(雲崗石窟)과 함께 중국 3대 석굴로 꼽힌다. 하남성과 낙양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명성이 대단하며, 명성에 걸맞는 규모와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남성 낙양시 남쪽 13㎞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백거이 묘가 있는 향산과 용문산이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낙양(뤼양)은 중국 허난성의 직할시로 동주, 후한, 위, 진, 북위의 등 중국의 역대 왕조에 걸쳐 국도(國都)였던 적이 있던 고도다. 용문석굴은 5세기 말인 북위 효문제 때에 대동에서 이곳 낙양으로 천도했을 때부터 운강석굴을 계승하는 형식으로 처음 뚫어졌고 그 작업이 동서위, 북제, 북주, 수, 당에 이르는 400년간 계속되었다.  주로 북위시기와 당(唐)대 측천무후(武則天)시기에 많이 만들어졌는데, 그중 규모가 가장 크고 유명한 굴은 측천무후 시기에 만들어진 봉선사 석굴이다.

 

  이곳의 불상조각은 온화하면서 우아한 미를 자랑한다. 이외에 용문석굴의 대표적인 동굴로는 고양동(古陽洞), 빈양동(賓陽洞), 연화동(蓮花洞),약방동(葯方洞), 간경사(看經寺),만불동(萬佛洞), 잠계사(潛溪寺), 대만오불동(大萬伍佛洞) 등이다. 2345여 개의 석굴, 2800여 개의 비문, 50여 개의 불탑, 10만 개 정도의 조각상이 남아있다.

 

  석굴의 불상이 비어있는 곳이 많은데 이는 청대 말 이후 미국 프랑스 영국 일본 등 열강들에 의해 도난당한 것으로 보인다. 또 모든 불상들 얼굴이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는데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에 의한 저질러 진 것이라고 한다. 용문석굴은 2000년 11월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고, 이강을 따라 약 1.5km에 걸쳐 있다.       

 

 

 

 

 

 

 

 

 

 

 

 

 

 

 

 

 

 

 

 

 

 

 

 

 

 

 

 

 

 

 

 

 

 

 

 

 

 

 

 

 

 

 

 

 

 

 

 

 

 

 

 

 

 석굴 안이 비어있는 곳이 많다.

 

 

 

   손 때가 반들반들한 불상들. 나도 손 때를 묻혀 다녀감을 부처님전에 알린다.

 

                           용문석굴에서 가장 작은 불상이 2cm라고 한다.

  

 

 

                    

  연화대 위에 정병을 들고 선 관세음보살 상이다. 중생들의 손 때가 묻어 반질거리는데 명문이 새겨져 있어 뒤에 읽어보니 680년 당나라 고종 때 현조(玄照)스님(?)이 조성한 것이다.  신라스님으로서 당나라에서 인도로 구법(求法)을 떠난 스님 7명 중 현조(玄照)스님이 이 있다고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사진의 현조스님이 그 신라스님인가 하는 묘한 인연에 대한 감회가 들어 찾아보니, 675년에 인도에서 입적한 것으로 되어있어 아닐 거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같은 분이었다면 대박인데 하는 아쉬움 아쉬움이 심하게 든다만...... 사진을 찍어 명문을 다시 보니 중생의 염원이 가득 담겨있다.          

 

                    大唐調露二年 歲次 庚辰七月十五日 (대당조로2년 세차 경진7월15일)

                    玄照敬造觀世音菩薩一區                (현조경조관세음보살 1구)

                    願救法界杳空 無始罪障 今生疾厄皆得消滅  (원구법계묘공 무시죄장 금생질액계득소멸)

 

                    대당 조로2년 (680년) 경진년, 7월15일

                    현조(玄照)는 삼가 관세음보살 1구를 조성하였사오니

                    원하옵건대 법계의 끝없음을 터득하고

                    죄와 업장을 짓지 않으며

                    금생의 疾苦(고통)와 재액(災厄)이 모두 소멸되기를 바라나이다

 

                     ※ 이재구 판독 해석 

 

  

  

 

  

 

   봉선사 노사나불 

  

   봉선사동은 석굴이 아니라 마애대불이다. 서산의 중앙에 위치하며 산의 중턱은 사방 30미터 깍아내어 대노사나불 좌우에 불제자 (가섭과 아난) 보살상(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새기고 좌우측면에 신왕상 금강역사상 등 9좌를 새기고 있다. 불보살상의 얼굴이 몸체에 비해 큰데 이는 불상을 크게 보이는 효과를 나타낸다고 한다. 본존불의 8각대좌 북면에 대노사나 상감기(像龕記) 명문에 의하면 고종(唐)의 칙령에 의해 조성되었으며 함형(咸亨) 3년(672년)에 기공하여 상원(上元) 2년(675년) 연말에 낙성되었다고 한다. 

 

  황제의 칙령으로 고종의 초상조각으로 조성하기 시작했고 측천무후가 화장료(化粧料) 2만관을 내어 그 조영을 도왔다는 점, 대불은 후광 대좌를 높이 85척(17.14미터), 두 보살은 높이 70척 등 자세하게 조립연유를 서술하고 있다. 봉선사의 사호(寺號)와 건축은 늦어져 조로(調露) 원년(679년)에 칙명으로 정해졌다고 한다.  황실(唐)의 제사를 주관하는 사찰에 귀속된 절이었기에 이름도 봉선사(奉先寺)라고 했다. 폭 35미터의 커다란 감실에 만들어진 노사나불 등 조각상들을 보호하기 위해 송, 금 시대 사람들은 목조 건축물을 설치했다. 그러나 이 건축물이 불상의 통풍에 악영향을 주면서 풍화가 가속화돼 결국 건축물을 제거했다.

 

  무엇보다 봉선사 노사나대불은 규모나 예술적 완성도에서 이전 석불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한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불보상 조성을 국가적인 사업의 하나로 추진하였다. 불상의 조성은 왕이나 귀족들외 아무나 할 수 있는 사업은 아니였기에 대개 조성 의도에 따라서 불상의 종류가, 주체에 따라서 주체자의 모습이 불상에 반영되는 현상은 일반적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세계적으로 자랑할만한「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은  미륵선화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20세 전후의 선덕여왕 모습을 미륵보살로 승화시킨 것이라 한다. (한국 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미륵 하생과 아미타 출현」최완수)

  주불의 용모는 측천무후가 모델이라고도 말해지기도 한다. 당시 당의 고종은 병으로 비실거려 실권은 측천무후에게 있었고, 노사나불에서 풍기는 여성적 미모도 그런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아뭏튼지간에 거의 모든 불상이 파괴되고 도단당한 상황에서 봉선사 주불인 노사나불만이라도 온전하게 그 모습을 남기고 있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측천무후의 본명은 무조(武?). 무후, 무측천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고종(高宗:649~683)의 비(妃)로 들어와 황후(皇后)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40년 이상 중국을 실제적으로 통치했다. 생애 마지막 15년(690~705) 동안은 국호를 당(唐)에서 주(周)로 변경하고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썼다. 무후는 당조의 기반을 튼튼하게 해 제국을 통일했다.』

 

 

  

 

    돈황석굴이나 운강석굴과 용문석굴은 우리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6세기 중엽 신라 최초로 천연암석을 파내어 감실에 새긴 일명 경주 남산불곡 감실할매부처인「경주남산불곡선정불좌상」, 668년경 조성된「군위석굴아미타삼존상」, 경주 토함산「석굴암」등이 석굴의 형태를 취해 조성한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다. 용문석굴을 보니 이런 석굴의 가장 완성된 형태가 경주 석굴암이 아닌가 한다. 주불과 보살상, 제자들의 배치와 조각의 세련미와 섬세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용문석굴 건너 편의 백거이 묘가 있는 향산을 잠시 둘러보고 오전 여행을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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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산과 소림사를 찾아서

 

   숭산(崇山)은 중국 오악(五岳) 중 하나인 중악(中岳)에 속할 만큼 산세가 험하고 이름이 나 있는데, 동쪽을 태실산(1440m), 중앙을 준극산, 서쪽을 소실산(1405m)이라고 한다.  소실산 자락에 소림사가 자리하고 있다. 중국 무술영화를 많이 보아온 사람들은 소림사를 무협지의 본산 쯤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중국의 선불교는 인도에서 온 달마대사가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수행을 하며 시작되었으니 소림사가 선종(禪宗)의 본산이다. 신라 때부터 소림사에 유학 가 공부를 한 스님들도 있는데 하동 쌍계사를 창건한 혜소스님(진감국사)이 대표적이다.  

 

    낙양에서 1시간 정도 버스로 달려오니 대지위에 흰 바위 암벽으로 된 거대한 숭산이 우뚝 솟아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숭산 인근의 영태사로 가는데 식당이 영태사 안에 있다고 한다.

     

 

   영태사. 양무제(502-549)가 딸 소명련을 안치하기 위해 세웠다는 절이다. 초기 이름은 명련사라고 하며 북위 정광2년 (521년) 효명제의 여동생 영태공주가 여승이 되어 영태사로 바뀌었고 숭산에서 유일한 비구니 사찰이라고. 식당이 사찰에 붙어 있어 점심을 먹고 숭산(嵩山) 산행지로 이동했다. 

 

   이틀간의 산행으로 조선족 가이드(김철민)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산에 못가겠다고 한다. 버스에 남겨두고 서울에서 온 여행사 대표와 9명이 숭산의 소실산 트레킹에 나선다. 

 

  초입의 급비탈진 계단을 맨몸으로 헐떡거리며 오르는데  중국 인민들이 25KG 시멘트 자루를 어깨에 둘러메고 올라간다. 산위에 삼황채라는 건물을 짓고 있는데 그기까지 운반하는 모양이다. 시멘트 자루를 들어보니 꿈쩍도 않는다.  신기한 점이 중국의 험산은 계단이 아주 잘 다듬어져 있거나 벼랑을 가로 지르는 잔도(棧道)가 잘 놓여 있는데 수천년의 노하우도 있겠지만 대개 이런 인민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 황산을 가보았지만 케이블카가 운반 할 수 있음에도 건물부재나 계단돌 심지어 호텔의 식료품까지  모두 인력으로 운반하는 것을 보았다.

 

 

  이런, 낙서를 하다니!

 

 

  

 

 

   숭산 산행은 초입에서 케이블카까지 보통 3시간 걸린다고 하는데 2시간 반 걸렸다. 당초 케이블카가 운행하지 않는다고 하더니만 와 보니 케이블카가 잘 다니고 있다. 걸어갈까 타고 갈까로 설왕설래 하다 타고 내려간다.

  소림사 탑림(塔林)


  소림사 고승들의 사리를 안치한 부도탑군이다. 200여기가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고승들의 돌로 만든 사리탑은 조그마한데 비해 중국 스님네의 사리탑들은 크게 짓는 경향이 있다. 중앙의 가장 큰 탑이 최근 입적한 주지스님의 사리탑이라고 한다. 옛부터 사리가 많이 나오는 고승일 수록 탑을 크고 높게 올렸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고승이 그리 원했을리는 없고 제자들이 한 짓이겠지만서도 空을 말하는 불교에서 큰 사리탑 경쟁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소림사

  

  서기 464년, 불타선사(佛陀禪師)라는 인도의 승려가 중국으로 와서 불법을 전파하기 시작했는데 소림사(少林寺, 샤오린샤)는 북위의 효문제의 명으로 이 불타선사(佛陀禪師)를 위하여 495년 창건되었다고 한다. 인도의 불경들이 소림사에서 번역되었고 선종의 교리가 완성되었다. 이 불타선사가 참선 수행 방법의 하나로 무술을 도입하였는데, 훗날 고난도의 악명 높은 소림 쿵후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숭산을 먼저 타고 거꾸로 소림사로 내려오는 바람에 표가 없어 소림사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표를 사가지고 오라는데, 표 파는 입구까지 거리가 엄청나게 멀어 포기하고 주마간산으로 보고 정문으로 향한다.

   

    소림사 일주문  天下第一名刹 禪宗祖庭 (천하제일 명찰, 선종조정)이라 쓰여있다.  

  소림사의 무술학교에서 무예를 공부하는 중국 학생들

 

  인근에는 초중고 수준의 무예학교 건물과 기숙사 등이 많아 마치 거대한 캠퍼스 같았다. 소림사인지 정부인지는 모르나 정책적으로 무예를 가르치고 해외로 보내는 것 같다. 전국 또는 해외에서도  소림사 무예학교를 지원하는데, 하루 6시간 무예를 가르치며 1학기 비용이 4,100$이라나! 이연걸이나 성룡도 이곳 소림사 무술학교 출신이라고 한다.  소림무술학교 출신들의 가장 큰 꿈은 성룡이나 이연걸 같은 배우가 되는 것이고, 그거 아니라도 경찰, 경호원, 경비 등 취업률 거의 100%를 자랑한다고...

 

  숭산 트레킹 및 소림사 탑방을 마치고 정주로 가는데, 인구 600백만이라는 정주시내에서 버스 기사가 호텔 숙소가는 길을 헷갈려 같은 길을 몇 바퀴를 빙빙 돌다 가이드가 택시를 잡아타고 버스가 뒤를 쫒아가는 촌극 끝에 1시간이면 숙소까지 간다던 것이 2시간 너머 걸렸다. 뭐 여행이라는 것이 그런 재미도....

 

 

  

 

  중국 아이들은 아침을 길거리에서 해결하는 모양이다. 등교시간에 노점상에서 열심히 사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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