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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모음

지리 동부7암자터 산행기

by 하얀 사랑 2013. 1. 2.

 

 ○ 날짜 : 2012.12.25(화) 

 ○ 산행지 : 동부7암자터

    환쟁이골 다리 08:20 - 박쥐굴 - 지장사터 - 금낭굴 - 선열암터 - 독바위 - 안락문 - 고열암·신열암터 - 의론대 - 선녀굴 - 유슬이굴 - 환희대 - 환쟁이골 다리 16:20    

   ※ (이동하여) 세진대(洗塵臺)   

 

 

 

   단풍이 울긋불긋한 시절이 지난 11월 초였는데 입산금지 기간을 지키느라 약간의 틈새가 생긴 사이에 어느새 12월 말이다.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순식간에 지났고, 지리산에는 벌써 몇 차례의 눈이 내렸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번 산행은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함양에서 출발하여 처음 지리산으로 처음 들어간 함양 독녀암 코스다. 유두류록에 나오는 독녀암 주변의 지장사, 선열암, 독바위, 신열암, 고열암, 의론대, 환희대 등 선생이 지나간 자취를 더듬어보고, 아울러 이름을 남기지 않은 옛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수행처(금낭굴,유슬이굴,선녀굴)를 둘러보며 임진년의 마지막을 산행을 장식하는 것이다. 이재구 송건주 박노욱 한영택 그리고 나 

 

 

  산행 초입의 환쟁이골 입구에다 차를 대고 적조암(寂照庵)을 지난다. 두어 채의 민가가 있으나 겨울 속에 선 적조암은 횡하기만 하다. 적조암 인근 감나무는 아직까지 농익은 감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데 추위에 얼었는지 검붉기까지 하다. 외진 곳이라 사람 손은 고사하고 새들도 외면하는가. 고개를 들어보니 산을 보니 온통 눈으로 덮였다.  

 

 

   적조암에서 계곡따라 올라가다 개울 건너 좌측 능선으로 붙으니 박쥐굴이다. 큰 바위 두 개가 맛배지붕 마냥 붙어 동굴을 이루어 안은 넓고 아늑하다. 양편에 문을 달고 온돌만 놓으면 사람이 살아도 거뜬하겠다. 이름과는 달리 양쪽이 트이고 밝아 박쥐가 살만한 동굴은 아닌 듯하다.  아! 인류가 멸망할 수 있는 몇 가지 원인 중 하나가 박쥐의 멸종도 들어 있던데, 박쥐가 없으면 곤충의 대량 번식을 막을 방법이 없다나...   눈길에 대비해 스패츠를 착용하고 아이젠을 등산화에 채운다.

 

 

  올해 2월 초 종석대 산행 이후 처음으로 눈 산행을 하니 겨울산이 그리웠는데 마음이 급하다보니 겨울산정에서 보는 청렬한 아름다움이 발걸음보다 가슴에 먼저 와 닿는다. 시원한 산내음 맑은 바람이 귓전을 파고들고, 바람이 스쳐간 고운 눈을 앞 사람이 밟고 뒷사람은 앞 발자국을 따른다. 그래서 눈 덮힌 길을 갈 때는 어지러히 가지 말라 했던가!         

 

 

   박쥐굴에서 사면을 타고 올라간 첫 능선 바로 아래에 도착하니 김종직 선생이 지리산에 들 때 처음 쉬었던 지장사(地藏寺)다. 지금은 옛 암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다만 누군가가 모아둔 기와 파편 몇 조각만이 오래 전 절터였음을 알려준다. 

  지장사(地藏寺)는 아귀지옥에 있는 중생들이 모두 성불할 때까지 지옥에 남아 구제 활동을 계속하겠다고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을 주존불로 모신 절이었을 것이다. 중생이 길을 잃으면 보살도 병든다는 유마경의 말이나 지장보살의 서원같은 것은 모두 사바세계에서 허우적 거리는 중생 모두 한 배를 타고 서방정토로 가자는 대승(大乘)의 자비사상의 표현이겠지. 

  잠시 둘러보니 절터 뒷편은 적당히 바람을 막아주고 앞쪽은 잡목만 없다면 경관이 시원한 자리다. 산의 사면을 타고 금낭굴로 향한다.   

 

  금낭굴

 

  비단주머니 같은 금낭화 꽃을 닮았는지 이름이 금낭굴이다. 뭐 닮은듯 아닌듯 잘 모르겠고 뒤로 바위 절벽과 그 속에 작은 굴도 있고 앞으로는 전망도 있으니, 어느 도사나 스님이 정진했을 만한 곳이다. 7암자 순례객들이 더러 있는지 리본을 매달아 위치도 적어 놓았다. 7암자터는 독녀암 주위로 분포해 있기 때문에 순례길은 능선을 따라가는 산행이 아니고 능선과 계곡을 가로지르는 길이라 리본이 도움이 많이 된다.   

 

 

  선열암(先涅庵)터

 

  산을 오르다 바위 사면을 기어오르니 바위 절벽아래 샘이 있고 바위 사이로 바람을 피하기 좋은 장소가 나오는데 선열암터다. 김종직 선생이 여기 왔을 때 등나무덩굴 한 가닥을 나무에 묶어놓고서 잡고 오른 모양이다. 암자가 있는데 바위 곁에 오이와 무를 심어 놓았고, 조그만 돌절구에는 두세 되 쯤 되는 빻은 싸라기가 있을 뿐이었다고 한다. 길 안내를 맡은 승려 법종이 말하길  "옛날 (이 절의) 한 비구(比邱)가 하안거에 들어가 우란분(盂蘭盆)의 공양를 끝낸 뒤 구름처럼 정처없이 떠나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안거를 마친 스님네들이 가사와 발우를 바랑 속에 넣고 바람에 묻어 떠나는 운수납자(雲水衲者)의 행각은 아주 과거에도 지금과 마찬가지였나보다. 좋은 풍경을 즐기겠다고 마음에는 욕심을, 배낭에는 도시락과 술을 잔뜩 짊어지고 산으로 떠도는 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이라! 

 

  선열암 앞의 고목 

  함양 독바위로 알려져 있는 독녀암(獨女庵)

 

  유두류록에 "한 부인이 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거처를 만들고 그 안에 혼자 살면서 도를 닦아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고 독녀암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옛부터 그런 전설이 있었던 모양이다. 돌을 쌓아 놓은 것이 아직 남아 있어 그럴듯하게 들리는데, 이와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독녀암에서 보이는 건너편 부처바위(상내봉, 유두류록에는 미타봉이라 함)이다. 비슷한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있는데  "계집종 욱면이 주인인 아간 귀진을 따라 경주 남산 동쪽의 미타사에서 9년간 열심히 예불하여 절 지붕을 뚫고 나갔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미타사는 경주 남산 동쪽기슭에 지금도 있는 절이다.) 해서 지리산 독녀암 이야기나 경주 미타사 욱면 이야기는 단순히 여인네들의 성불 이야기가 아닌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꿈꾸는 하층민들의 염원으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눈꽃이 내린 독녀암 정상에는 바람의 흔적조차 간데없이 고요하다. 이런 것을 적멸(寂滅)이라 해야 하나!  말을 잊은 곳에 남는 것이 풍경이라고 했던가?  산정의 눈꽃내린 풍경 하나가 말한다. 고요히 바라만 보라고...3조 승찬조사는 「信心銘」에서 "유수식견(唯須息見)"이라 했으니 봄으로써 생겨나는 생각을 멈추라는 말일게다. 해서리 멍청히 바라만 봐도 조~오타!  

  

    그러나 기어코 그 적멸의 자리에 올라가 발자국을 내고 흔적을 남긴 분도 계시니...아, 김종직 선생도 이 바위에 올랐던지...머리털이 쭈삣하고 등골이오싹하며 정신이 아득하여 선생이 선생 자신이 아닌 듯하였다나...

 

  독녀암에서 돌아나와 안락문을 지난다. 안락세계란 아미타불의 극락정토가 있는 지극히 안락하고 아무 걱정이 없다고 하는 곳이다. 이 역시 독녀암의 전설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독녀암의 그 부인께서 이 안락문을 통해 공중부양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보며 밥 때도 지나고 배고프니 안락세계를 찾아 고열암 자리로 찾아든다.  

 

  그런데 이쪽 저쪽에도 '안락문'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 어디로 가야 서방정토인지는 모르겠다. 원래 내 마음에 있는 것이니 어디 쪽인들 어떠하랴만서도...

 

  안락문을 지나와 고열암터에 도착하니 아늑한 동굴이 기다리고 있다. 김종직 선생이 하룻밤을 묵었던 고열암은 얼기설기 눈꽃을 맞은 잡목 우거진 빈 터로 남았고, 차가운 바람만이 그 사이를 황량하게 맴돌 뿐이다. 나무는 잎이 떨어져 뿌리만 남은 뒤에야 꽃과 가지와 잎이 다 덧없는 영화였음을 알게 되고, 사람은 관 뚜껑을 덮은 뒤에야 인생의 덧없음을 안다고 했던가? 지리산 골짜기에서 치열하기 구도하던 옛사람들은 흔적조차 없는데, 이제 마지막 남은 그 허명(虛名)을 찾아드는 산객들도 배고픔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배낭을 풀어 도시락부터 꺼내들 수밖에 없다. 날이 차니 겉옷을 하나씩 더 걸치고 술잔부터 돌린다. 설익은 라면 국물이 따스하게 목구멍을 적신다. 바람이 부니 눈가루가 하늘을 휘돈다.    

 

  독녀암

 

  김종직 선생은 독녀암의 높이가 1천여 자나 된다고 했고, 저 아래 별로 높아보이지 않는 환희대(歡喜臺)는 1천 길이나 된다고 했는데, 소년대 아래 절벽은 "1만 길이나 된다"고 했고, 소나무 중에는 큰 것은 "백 아름이나 된다"고도 했다. 남명 선생도 불일폭포 앞 서쪽 절벽을 "만 길 낭떠러지로 우뚝 솟은 비로봉"이라 했으니 따지고 보면 옛사람들의 문장에 과장 아닌 것이 있던가 싶다. 고열암에서 점심을 먹고 신열암에 들렀다가 의론대(議論臺)로 간다. 신열암도 마찬가지로 빈터만 남았다.  그런대 古涅, 先涅, 新涅庵은 깨달은 스님을 배출한 순? 아니면 절집을 세운 순일까? 

 

  의론대에서 본 부처바위(상내봉 또는 미타봉)

 

  의론대(議論臺)란 일찍이 선열암·신열암·고열암의 승려들과 이 바위에 앉아 대승(大乘)·소승(小乘)에 대해 담론하다가 갑자기 깨쳐서 붙은 이름이라 한다.  건너편 봉우리가 불상이 누운 얼굴을 하고 있는 부처바위(미타봉)이다. 마음이 어두운 나로서는 불상얼굴인지 잘 와닿지 않는데 눈 맑은 선각자들이 지은 이름이라 그려러니 하는 수밖에 없다. 독녀암 주위의 옛 암자터 주위에는 대개 동굴이 있고 특히 주위에 마애불을 새길만한 큰 바위들이 많은데도 없는 것을 보면 수행자 위주의 禪宗 계열의 절집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의론대에서 내려서서 선녀암과 유슬이굴을 둘러본다. 선녀굴 안에는 샘이 있어 겨울임에도 맑은 물이 넘친다. 그러나 그 역시 인적의 자취는 오간데 없고 누군가 나무에 걸어놓은 팻말 하나만 이름으로 남았다. 선녀굴은 정순덕 이홍이 김은조 3인의 망실공비가 숨어 지내던 곳이라 하는데, 1962년 김은조가 선녀굴에서 사살되었고, 이듬해 내원골에서 마지막으로 이홍이가 사살되고 정순덕이 체포된다.

 

   모든 생명있는 것들은 생로병사하고, 만물은 생주이멸한다. 독녀암 주변 7암자는 모두 그 흔적을 지운지 오래 되었고, 540년 전 점필재 선생의 유두류록을 따라 산간히 산꾼들만이 길을 찾고 그 이름이라도 들춰내고 있다. 선생이 전해준 글은 이미 전설이 되었고, 지금 우리는 다만 그 빈 터에 서서 산과 숲과 전설이 전하는 산천의 법문을 듣는다. 

 

 

 

   산행을 마치고 적조암으로 내려오니 오후 4시다. 세진대란 곳에『雪松圖』에 나올 것 같은 멋진 소나무가 있는데 혹시 눈을 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며 송전부락의 소나무를 보러 가잔다. 세진대는 용유담 계곡이 있는 송전마을 산 중턱에 있다. 좁은 산길로 올라가니 눈이 채 녹지 않아 체인을 감은 차도 미끄러져 내린다. 차를 대고 20여분 걸어 올라가니 넓은 너럭바위에 멋진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안내판을 보니 세진대 약 200m  위에 마적사란 절이 있었는데 절에 가는 사람들이 이곳에 이르러 마음과 몸의 때를 씻고 갔다하여 세진대(洗塵臺)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수령 400년이라는데 소나무는 우람하고 기상도 꼿꼿하다. 안아보니 세 아름은 족히 된다. 옆에는 나그네들을 위한 정자도 만들어 놓았다.   

           

  너럭바위에 서서 멀리 깊은 골짜기를 내려보니 지리산 골짜기가 아득하다. 바위 아래는 옛사람의 표현을 빌리자면 천길 만길이다. 여기 앉아 막걸리 마시며 경치 구경하기에는 최고일 듯하다. 아니면 도닦는 사람처럼 눈 지그시 내리깔고 좌선을 함 할까나! 옛 사람들이 여기서 지리산 깊은 골을 내려다 보며 마음의 티끌을 씻었다는 것은 산에 왔으면 나같이 씰데없는 생각말고 자연의 풍경이나 조용히 보다 가란 말이겠지만서두... 

  

  임진년 마지막 지리산행이 끝났다. 어찌 지리산 송년파티가 없을손가? 모처럼 부산까지 가서 한 잔하고 나니 오늘이 성탄절일세!  동지가 지나면 해가 길어지니 사실상 해가 바뀐 것이다. 해가 바뀌었으니 실데없는 연륜(年輪)만 또 하나 더했다. 

 

  찍사 : 한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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