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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모음

하동 독바위 산행기

by 하얀 사랑 2012. 11. 8.

지리산 혜일능선과 불일협곡의 가을
[염기훈 2012/11/08 15:09]

 

○ 일시 : 2012. 11. 3 (토) 05:00  

○ 코스 : 국사암  - 도성암 - 불일암·불일폭포 - 혜일봉능선 - 상불재 - 하동독바위 - 지네능선(부분) -

             국사암능선 - 부도 - 국사암

○ 일행 : 이재구 송건주 한영택 염기훈

 

 

  수류화개

 

  차(茶)의 시배지로도 알려져 있고, 화개동천(花開洞川)으로도 불리는, 봄이면 벚꽃길로 유명한 화개(花開)에는 쌍계사와 국사암 불일암 등 신라 때부터 전해오는 유서 깊은 사찰이 있다. 그중 대표적격인 쌍계사는 삼법·대비 두 스님이 722년 당나라에서 육조 혜능의 머리뼈를 모셔와 봉안한 곳이다.

  꿈에 어떤 스님이 나타나 "지리산 눈 속 칡꽃이 핀 곳에 봉안하라"는 계시를 받고 절터를 찾았다고 하는데 화개(花開)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다.

 

  전설에 따르면 삼법스님은 옥천사(쌍계사) 국사암 목압사의 세 절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100년 뒤 혜소스님(진감국사)이 폐허가 된 절터를 찾으려고 화개입구에서 나무 기러기 3마리를 날렸더니 각각 3곳에 앉았다고 한다. 그 자리를 파 보니 기왓조각과 주춧돌 등의 절터가 있어 다시 절을 세웠다고.

  다른 하나의 전설은 최치원이 지금의 신흥동천 합수부에서 나무기러기를 시냇물에 띄웠더니 마을 앞에서 멈춰 거기서 계곡을 건너 지리산 불일폭포 쪽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 마을이름은 목압(木鴨)이 되었다. 민속학적으로는 아마 절 아래 신성한 마을로서 솟대가 있어 목압(木鴨)이 되지 않았나 싶다.

 

  이번 산행은 국사암에 차를 대고 불일암(불일폭포)를 거쳐 혜일봉능선으로 올라 하동독바위에서 점심을 하고 국사암으로 하산하는 코스다. 이제 단풍도 지고 낙엽도 지고 산색도 변하여 산은 쓸쓸하겠지만 그런 풍경에도 좀 익숙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국사암에서 쌍계사로 넘어가는 산길에는 능선과 계곡을 넘은 햇살 알갱이가 소나무 숲을 스치고 대나무 숲의 잎새에 환하게 내려앉는다. 아침은 차지만 잔잔하여 겉옷을 벗을까 고민하며 산길을 우리 네 명이 독점한다. 

 

 

  도성암

 

  초입에서 조금 진행하다 작은 나무다리 오른편 샛길로 빠져 능선을 올라가니 도성암이 숨어있다. 사방이 능선에 둘러싸여 따뜻한지 고추밭에 아직 풋고추다 조랑조랑 달렸고, 배추 무우는 곧 시작될 김장준비로 속을 채우며 자라기 바쁘고, 머위는 지천에 무성하게 잎을 세우고 있다. 축대 아래 모과나무에는 노랗게 익어가는 모과가 주렁주렁 달렸고, 감나무는 주홍빛으로 무르익은 홍시가 다닥다닥 붙은 가지를 힘에 겨운 듯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껍질을 벗긴 채 바람에 시들고 햇살에 말라가는 노란 감들이 열을 지어 창고 앞에 매달렸고, 입구의 정주목을 넘은 객들의 마당 밟는 소리와 인기척에도 스님은 기척조차 없다. 하얀 고무신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인 마당에 서서 앞산 풍경을 바라보노라니 잠시 내가 주인인양 한가로운 착각에 빠진다.

 

  도성 앞 내원골 산 아래도 붉게 익었다. 가을이 무르익어 보기에 좋다고 산더러 변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잎새가 더 이상 매달려 있을 수 없을 때쯤이면 산속은 찬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산길을 찾아다니며 농익은 감색에 반하고 붉게 물드는 산그림자에 눈물겨워 하는 것 아니겠는가! 도성암에서 나와 능선을 계속 올라간다.

 

 

     미친 약속

                                            문정희

      창밖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풋열매가 붉고 물렁한 살덩이가 되더니

     오늘은 야생조의 부리에 송두리째 내주고 있다

     아낌없이 흔들리고 아낌없이 내던진다

 

     그런데 나는 너무 무리한 약속을 하고 온 것 같다

     그때 사랑에 빠져

     절대 변하지 않겠다는 미친 약속을 해 버렸다

 

     감나무는 나의 시계

     감나무는 제자리에서

     시시각각 춤추며 시시각각 폐허에 이른다

 

     어차피 완성이란 살아있는 시계의 자서전이 아니다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불일협곡

 

  비로봉에 섰다. 길을 모르는 자에게는 길이 없듯이, 불일암 마당에 담 너머로 보이는 비로봉과 향로봉은 언제나 피안처럼 보였는데, 비로봉에 서니 불일암은 ‘길없는 길’이 되어 요지부동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불일협곡은 좌우로 비로봉과 향로봉을 거느리고, 아래로는 거대한 폭포와 용추(龍湫) 학연(鶴淵)의 두 연못을 가졌고, 앞으로는 백운산까지 확트인 전망을 지녔으니, 최치운이 학을 불러 타고 놀았다는 환학대(喚鶴臺)가 여기가 아닐성 싶다. 비로봉에서 돌아 조금 내려가니 불일암이다. 암자 이름은 보조국사 지눌이 수도한 곳이라 그 시호를 딴 것이다.

 

  나중에 하산하며 산 위에서 보니 비로봉과 향로봉은 과거 한 능선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그 중간 능선 일부가 허물어지며 지대가 낮은 내원골로 물줄기가 바뀌며 협곡이 생기고 불일폭포가 만들어 진 것으로 보인다. 내 상상으로는 마고할미가 불일암 자리에서 앉아 급하게 볼일을 보는 바람에 비로봉과 향로봉 사이 능선이 허물어지면서 내원골로 계곡이 열린 것이 아닌가하는.....

 

 

  불일폭포는 용이 꼬리를 살짝 쳐서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 높이가 60m다. 여름철 비가 많이 올 때 폭포는 더욱 장관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벼랑과 골짜기가 아주 가팔라서 길을 낼만한 곳이 없다. 그러므로 절벽 중간을 한 사람이 갈 수 있게 파서 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오가는 자로서 놀라 땀이 나며 머리 끝이 쭈뼛하지 않는 자가 없다. 암자는 벼랑에 달아 맨 듯한데, 밑이 수백 길이나 된다. 못이 두 곳인데 깊이를 알 수 없으며, 하나는 용추(龍湫), 하나는 학연(鶴淵)이라 한다.』했다.  

 

  매번 다니던 길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비로봉에서, 불일암에서, 전망대에 내려가서, 폭포 위에서, 향로봉에서 등 다른 장소, 다른 시각으로 불일협곡을 돌아보는 것도 꽤 괜찮은 생각이다.

 

  장자 추수편에 '우물 안 개구리는 사는 곳 매이고, 여름 벌레는 계절에 매이고, 선비는 가르침에 매인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어디에 매어 있는가? 산길조차 매번 아는 길로만 다니니 쬐그만 지식이나 생각에 매양 매여 사는 것 아닌가? 해서 지리산을 찾아 발품을 팔며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산정에서 먼 산 바라보는 것은 스스로 옭아매고 있는 생각의 끈을 잠시나마 풀어버리려는 것이다.

 

  향로봉에서 혜일봉능선을 타고 오르니 멀리 악양 형제봉능선의 패러글라이드장 깃발도 보인다. 산길은 편안하다. 12시 상불재다. 청학동과 삼신봉 불일암 쌍계사를 이어주는 등산로에 들어섰다. 능선을 거의 다 올랐을 때의 맛은 마치 로또복권 샀거나 점집을 찾아가는 마음이랄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곧 능선에 올라서니 시원한 하늘 아래로 청학동과 묵계저수지가 눈에 펼쳐진다.

 

 

  하동독바위는 주등산로에서 조금 비켜있다. 독바위 아래로 청학동으로 내려가는 길도 나있다. 옛날에는 길이 거의 희미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반들반들하다. 이재구는 지리산에는 3개의 독바위가 있는데, 새봉은 옹기 독(甕), 상내봉은 독녀암(獨女巖)의 독(獨), 하동독바위는 개 독(Dog?)이라며 웃기는 소리를 한다. 독구(Dog狗)를 닮았다나!  하동독바위에 서니 청학동이 한 눈에 들어온다. 등산로 쪽으로 돌아 나와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은 후 지네능선으로 하산한다.

 

 

  가을이 깊어지니 산은 낱낱의 잔주름까지도 드러낸다. 조릿대의 누른 잎들이 햇살에 비쳐 금빛으로 반짝이고 먼데 산도 가까운 듯 순정하게 다가온다. 그 풍경을 보고 이재구가 벽암록의 구절을 읊는다.

 

   "수조엽락시여하(樹凋葉落時如何)  나뭇잎이 시들고 잎이 떨어질때는 어떻습니까?

    운문운체로금풍(雲門云體露金風)  가을바람에 그 본체가 여실히 드러나는 법이지"

 

  지리산을 다니는 것은 어려운 책을 읽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기신론이나 벽암록 같은 책을 읽으면,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나 싶어 덮었다가 슬그머니 다시 펼치는 것과 같이, 갈수록 첩첩산중이지만 다시 가지 않을 수 없는 매력이 지리산에 있기에 그렇다. 책 속의 한 구절이 주는 울림이 능선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풍경 한 장면이거나 계곡에 선 한 송이 꽃과 같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지네능선에는 전망 좋은 곳이 곳곳에 있어 천왕봉부터 노고단까지 주능선을 파노라마 사진 보듯 감상한다. 가을산길을 걷는 맛이란 이런 것일까? 기분 같아서는 영신남릉을 따라 단숨에 세석까지 뛰어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지네능선과 선유동계곡 그리고 쇠통바위능선이 모이는 끝자락의 건너편 토끼봉 아래 범왕능선 자락들이 정겹다. 언젠가 선유동 계곡과 쇠통바위능선도 답사할 것이다. 이재구는 "이 화개골짜기만 해도 1년 이상 다녀도 못 다닌다"고 한다. 하기사 건너편 범왕 능선 주변으로만 몇 번을 다녔던가!

 

 

  능선을 타고 내려 오니 화개동천과 섬진강이 햇살에 은빛 섬광을 반짝인다. 화개동천은 우리나라의 차 시배지이기도 하고, 지금도 화개동천을 따라가며 온통 차밭이라 사철 푸르고, 주능선 토끼봉에서 영신봉까지 넓은  능선과 큰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모두 화개동천으로 모여 흐르며 봄에 벚꽃이 만발하면 그 또한 장관인데 왜 수류화개(水流花開)인지 여기 높은 곳에서 보니 더 잘 알겠다.

지네능선은 길은 좋으나 낙엽이 쌓여 미끄럽고 경사가 급한 곳이 많다. 내려가다 국사암능선으로 갈아탄다. 몇 군데 헷갈리는 길에서도 이재구는 길을 잘 찾아든다. 국사암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진감선사 부도탑을 찾는다.

 

 

  진감국사 (774∼ 850) 부도

 

『 어렸을 때 집이 가난해 생선장사를 했고, 세공사(歲貢使) 뱃사공이 되어 당나라 신감(神鑒)에게 출가했다. 얼굴이 검다 하여 흑두타(黑頭陀)로 불렸다. 소림사[小林寺]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종남산에서 3년 동안 지관(止觀)을 닦고 또 길거리에서 짚신을 삼아 3년 동안 오가는 사람들에게 보시했다. 귀국하여 지리산에서 삼법화상(三法和尙)이 세운 절의 남은 터 위에 절을 지었다.

  왕이 만나기를 청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옥천사(지금의 雙磎寺)를 짓고 육조혜능의 영당을 세웠다. 성품이 질박하고 기교를 부리지 않았으며, 범패(梵唄)를 도입하여 널리 보급하기도 했다.

  문인(門人)에게 고하기를, "만법이 공하니, 내가 이제 가련다. 일심이 근본이니 너희들은 힘쓸지어다. 탑을 세워서 육신을 보존하려 하지말고, 명(銘)을 지어서 행적을 기록하지 말라."하고는, 말을 끝내자말자 앉은 자세로 입멸하였다.』

 

  고운 최치운선생이 쓴 진감국사대공탑비의 일부 내용이다. 유언과는 달리 탑(塔)은 쌍계사 뒷편 산자락에 부도(浮屠)로 남았고, 명(銘)은 왕명에 의해 최치원이 썼는데, 지금의 쌍계사 대웅전 앞에 있는 진감선사대공탑비 (국보 제47호)이다.

 

  부도는 부처님의 탑묘과 같은 의미로서, 깨달은 자면 부처와 동격이라는 의미로 선종의 출현과 동시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우리나라 남종선의 시조인 도의국사( ∼821) 부도탑(양양 진전사)을 그 시원으로 본다.

 

  진감국사(774∼850) 부도의 양식을 보면 8각형 부도의 예술미가 자리 잡기 전 초기 과도기에 건립한 것이 아닌가 짐작했으나, 그 보다 앞선 흥법사지 염거화상부도탑(국보104호 844년)의 조각에 비해 격이 많이 뒤져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하다. 기단부에 앙련과 복련의 조각을 새겼고 탑신괴임돌과 옥개석(지붕돌)에도 장식이 가미되어 있으나, 옥개석의 지붕은 밋밋하고 탑신석이나 안상에는 신라말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나 연곡사나 부도에서 볼 수 있는 문비 팔부신장 가릉빈가 서수 등 섬세하고 아름다운 조각은 없다. 또 전체적으로 상륜부가 커 비례도 맞지 않고,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 보주의 조각솜씨가 각기 다르게 보인다.

 

  "여러 명의 장인이 부분별로 만들다 노임을 못받았거나 배가 고파 대충 마감하고 퇴근한 것 아닐까?" 송건주가 농담 삼아 이야기 한다. 이재구는 "최치원이 성골진골 출신이 아니라 출세를 못했듯, 진감선사는 생선장사 출신이라 그런 대접을 받은 것 아닐까. 아니면 부도를 만들던 석공이 발령나서 가버리고 조수가 마무리한 거 아닐까" 한다. 설마?

 

  국사암에 들른다. 국사암은 사천왕수라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절집 앞을 지키고 있다. 4가지를 하늘로 뻗어있어 사천왕수라 하는데 그보다는 절집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의 사대천왕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들은 이야기로는 사천왕수가 담장 안에 있으면 곤(困)자가 되니 담장을 나무 안쪽으로 친 것이라 한다. 나무가 문밖에 있으니 한(閑)가롭지 아니한가.

 

  국사암 공양주 보살님이 "저녁 지어 드리테니 공양하고 가시라"고 친절을 베푸는데 얼굴이 부처님같이 맑다. 술 생각이 간절한 중생들이 절밥으로 저녁을 때울 수는 없는 법! 갈 길이 바쁘다며 절문을 나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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