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백운동천과 단속사지
서울 자하문 터널 지나 백운동천?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지리산 백운동천 제법 솜씨있는 찍사들에게도 자태를 보여주지 않는 곳.
히어리와 얼레지의 천국, 남명선생의 흔적을 흠모할 수 있는 산행입니다.
○ 일시 : 2014.4.6(일) ○ 코스 : 백운계곡(영산산장) 07:15 - 능선 - 감투봉 - 이방산 - 남명묘소 - 산천재 16:00 ○ 산행인원 : 5명 (이재구 한영택 박노욱 송건주 염기훈)
백두대간의 끝머리는 천왕봉에서 새재와 왕등재능선으로 이어지면 밤머리재에서 잔뜩 허리를 낮추고는 다시 웅석봉으로 치켜오른다. 웅석봉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산군을 이루며 둘레로는 경호강을 두르고, 허리에는 청계계곡과 백운동계곡을 거느리고 있으니 많은 산꾼들은 백두대간을 천왕봉이 아닌 웅석봉에서 시작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 백두대간의 끝머리를 어디로 볼 것인가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으나 천왕봉 천왕샘에서 발원한 물이 덕천강으로 흘러들며, 천왕봉의 산맥이 웅석봉과 달뜨기능선을 거쳐 그 물과 만나면서 천왕봉을 마주 볼 수 있는, 바로 남명선생의 묘소와 산천재가 자리한 곳으로 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남명선생이 이곳에 터를 잡은 것도 그런 연유도 있으리라.
이번 산행은 남명선생이 자주 찾았다는 백운동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며 계곡의 봄을 즐기고, 감투봉 이방산으로 거쳐 남명묘소와 산천재로 내려오는 코스다.
"웅석봉을 지리산으로 볼 수 있소?"
국립공원지역이 아니고 지리산과 웅석봉으로 이어지는 밤머리재를 가로질러 도로가 나버렸기에 하는 말이다.
"우쨋든 산맥이 이어져 있으니 지리산군으로 보는 것이 맞겠지요."
백운동계곡 입구에 차를 대니 7시15분, 초입 계곡 주위에는 민박집들이 들어서 있지만 이제 막 봄으로 들어서는 산동네는 초록으로 물드는 숲 사이로 산벚꽃이 약간의 꽃잎을 드문드문 날릴 뿐 인기척에도 내다보는 사람 하나 없는 산동네다. 백운동천은 원래 덕천강과 만나는 도구대 입구부터라고 하나 산행은 웅석봉의 지맥인 백운산과 화장산 사이 민박집들이 듬성듬성 있는 계곡 입구부터 시작한다.
바위 위로 넓게 흐르는 계곡물은 맑을 뿐만 아니라 물 아래 바위빛을 머금어 푸르기까지 하다. 淸流 靑流다. 앞으로 큰 산이 보이지 않아도 어디서 오는지 알수 없는 물의 흐름은 끊임이 없고 가지가지 폭포들이 만드는 큰 소(沼)와 작은 소(沼)들은 이제 막 기지개를 켜는 붉은 수달래와 어우러져 봄의 정취를 더한다. 누가 새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영남제일천석(嶺南第一泉石) 용문천(龍門川) 등의 각자가 있는 걸로 보아 동네 선비들이 이 계곡에서 풍류를 즐겼음은 백운동천이 주는 편안함 때문일 것이라.
바위말발돌이
산을 다니자면 가을을 지나며 겨우내 아쉬운 것은 꽃구경인데 4월들어 날씨가 갑자기 따뜻해져 벚꽃은 남북 지역 가릴 것 없이 한꺼번에 피었고 산에 와보니 계곡의 수달래도 꽃망울을 맺거나 꽃잎을 열었다. 철 지났다고 생각한 생강나무도 아직 노란 꽃을 달고 있고, 땅바닥으로 보라색 제비꽃이 앙증맞게 꽃대를 올렸다. 양지꽃도 노란 꽃을 달고 바람에 꽃잎을 나부끼고 있다. 바위 아래 처음 만나는 앙증스런 흰꽃을 조롱조롱 단 작은 나무가 있어 물어보니 한대리 "바위말발돌이"라고 한다. 무심하게 지나치자면 보잘 것 없는 것들 중 하나지만 카메라로 찍어 보면 어느 한 생명 귀하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런 뭇 생명들이 기지개를 켜는 계절이기에 겨울을 나는 동안 봄이 그리운 것이리라. 작은 폭포 아래 배암 한 마리가 빠져 허우적대다 익사해 있다. 동면을 지나고 아직 허기진 몸을 이끌고 물 속에 들어갔다가 차가운 폭포의 회오리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비명횡사 한 모양이다.
계곡 초입에서 1시간반 정도 올라가니 계곡을 가로지르는 임도가 보인다. 단속사가 있는 운리에서 마근담을 거쳐 산천재가 있는 사리까지의 지리산 둘레길 8코스가 여기를 가로지른다. 산 아래부터 띄엄띄엄 보이던 히어리가 상류쪽으로 올라갈 수록 계곡따라 많아지더니 아예 군락을 지어 노란 꽃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히어리는 한국 특산종으로서 지리산에 많이 서식하고 기타 지역에 자라기도 하지만 백운동천 상류지역은 아예 히어리 자생군락지로 지정해되 될만큼 많이 자라고 있다. 다만 향기 없는 꽃이라는 소문이 있다.
초입에서 세 시간 정도 올라가니 완만한 능선이 나오가 또다시 임도가 나타난다. 능선으로 더 올라가니 운리에서 웅석봉 가는 산길이다. 웅석봉 5km, 참나무 숲은 쌓인 낙엽과 앙상하게 메마른 가지들로 황량하고 봄은 아직 멀었다. 일찍 찾아온 따뜻한 봄날의 산아래만 생각하고 여벌옷을 준비하지 않았더니 바람이 차다. 삼거리에서 감투봉 쪽 앞서간 이대장, 햇살 좋은 곳에 점심자리를 폈다. 박노욱이 밭에서 어린 오가피잎과 두릎순을 따왔다며 내 놓는다. 입안에 향이 가득 전해온다. 나는 밭에서 처음 짤라온 부추와 쪽파 무침을, 이대장은 상추와 멍개젓갈을 한대리 각종 나물 반찬을 내놓아 한 쌈 가득 입에 넣고 소곡주 한 잔씩 돌리니 산위의 봄은 도시락 반찬에 먼저 찾아온 것 같다.
배부르니 이대장, 김삿갓인지 백호 임제의 시인지 모르겠다며 삼월삼짇날 화전 부치는 풍속이라며 한 수 읊는다.
鼎冠撑石小溪邊 작은 시냇가에 솥뚜껑 돌로 괴어 白粉靑油煮杜鵑 흰 가루와 푸른 기름으로 두견화 전을 부쳐 雙箸挾來香滿口 쌍젓가락으로 집어먹으니 향기 입안에 가득하여 一年春色腹中傳 한해의 봄빛이 뱃속으로 전해지네.
마근담은 웅석봉 능선이 남으로 뻗어내려오다 감투봉 이방봉과 수양산으로 갈라지는 계곡 사이의 작은 마을을 말함이다.
나, "마근담"이 뭔 뜻이요? 한자로는 마근담(麻根潭)이라 써던데." 이대장, "한자는 저그 쓰고 싶은데로 쓴 거고... '막은 담'이란 의미인데 산이 담처럼 둘러싸여 막혀있는 산골 마을이란 의미지요. 담이란 땀에서 온 말인데, 시골에 띄엄띄엄 있는 집들을 '땀'이라 안하던교? 바느질 할 때 한 땀 두 땀...웃땀 아랫땀 점땀 등 작은 마을을 가리킬 때 제법 쓰는 말인데?" 나. "처음 듣는 말일세"
우쨋든 마근담이나 딱바실 등 정겨운 우리말 이름을 산골 동네에서 만나니 반갑다.
비록 지리산 출입통제기간이라 멀리 지리주능선에서 벗어나 빙빙 돌고 있긴 하지만 천왕봉이 환하게 보이니 지리산에서 멀리 벗어난 것은 아닌듯 하여 반갑다. 감투봉에서 산천재 내려가는 능선에는 진달래가 만발하여 산길을 밝히고 있다. 근데 이방산은 이 능선에서 씰데없이 홀로 높은지 올라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 옛날 고을 아전들이 민초들을 못살게 굴던 것과 어떤 관계가 있어 이방산이란 감투가 붙었는지는 모르겠다며 씩씩거리며 오른다.
이방산에서 하산하니 장뇌삼을 재배하는 듯한 농장 울타리를 길게 지나고 나니 넓은 공지가 나오고 임도가 닦여있다. 얼레지가 군락을 이루며 피었는데 이렇게 조밀하게 자라는 얼레지 군락은 처음이다. 한 뿌리에서 한 개의 꽃만 피고, 잎은 한 장과 두 장으로 나오는데 한 장을 가진 잎은 개화하지 않는다고.
얼레지 군락에서 임도따라 남명묘소까지 30여분, 예전에 왔을 때는 임도가 없었고 그 때 잠시 길을 잘못 들어 알바도 했었는데 길이 닦여있어 내려오기는 좋지만 아뭏튼 운리 백운동천 마근담 주변 산들에 너무 많은 임도를 내어 산을 허물어 놓았다.
남명 조식 남명묘소는 이방산 능선의 끝자락과 덕천강이 만나는 산천재(山天齋) 바로 위 산자락에 있다. 남명선생의 묘소 바로 아래에는 둘째 부인 송씨의 묘가 있다. 이대장 술 잔 올리고 절한다. 남명의 유적은 김해에도 있는데 산해정(山海亭)이 그것이다. 30세에 어머니 봉양을 위해 고향(합천 삼가)에서 처가(남평조씨)가 있던 김해 신어산 아래 炭洞 (대동면 원동)으로 이사했다. 거기서 공부할 집을 짓고 山海亭이라 했다.
탁영대(濯纓臺) 탁영대는 입덕문 각자바위 아래 하천변에 있다. 도로가 말끔하게 나면서 가드레일을 쳐 놓았고 차를 댈 곳도 없고 안내 표지판 하나 없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은 알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개발에 밀려 옛 것 하나 제대로 보전하지 못하고 방치하거나 폐기해 버리는 현실이안타까운 것이 작은 것도 크게 부풀려 뻥티기와 신화화 하는 중국 넘들이나, 없는 것도 만들어 마치 옛날부터 있던 역사처럼 창조해 내는 일본 넘들에 비해 우리는 있는 것조차 제대로 보존하거나 관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산천재에서 가깝기는 하지만 남명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있어보이지는 않는다고. "여까지 왔으니 단속사지 함 갑시다." "매화꽃도 다 지고 없을낀데 뭐하러?"
단속사지는 산청군 단성면 운리에 있다. 산행종점인 산천재에서 멀지 않은 곳이고 지리산 둘레길 7, 8코스 기점 인근이라 산행초입인 백운계곡에서도 가깝다. 지금은 탑 2기와 당간지주만이 남아있고 민가가 들어서 탑이 없다면 절터였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렵게 되었지만 우리나라 선불교의 탯자리이기도 하고 '정당매'란 오랜 늙은 매화 한 그루가 옛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곳이기에 늘 마음이 가는 곳이기도 하다.
단속사지로 향하다 청계리 용두마을에 차를 대고 하천가 '광제암문(廣濟?門)' 각자가 새겨져 있는 석벽을 찾아 내려간다. 옛날 단속사로 들어가는 입구로 추정되는 곳인데 큰 바위에 몇 가지의 글자가 새겨져 있고 석불인지 벅수인지 알 수 없는 석상이 바위 앞을 지키고 있다. 이대장은 석불일거라고 말한다. 탁영 김일손의 두류기행록에는 廣濟?門 각자는 최치운 선생의 글씨로 전해진다고 했으나 지리산 곳곳에 새겨진 각자에 대해 그런 주장들이 많아 사실일 가능성이 낮다. 큰 각자 옆에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어 누가 쓴 것인지 단서도 될만하나 알아보기 쉽지 않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석벽 아래에 짚신을 벗어 두고 절집을 구경하고 나오면 짚신이 썩어있을 만큼 단속사가 큰 절이었다고 한다.
이대장이 광제암문 각자 양편 세로로 새겨진 작은 글씨 자료를 구해준다. 단속사 발굴조사팀 탁본 자료가 있었던 모양이다. "995년 (고려성종 14년)에 蕙○ 스님이 글을 쓰고, 曉禪 스님이 새겼다"는 것으로 보아 단속사 스님이 절 초입을 나타내는 의미(말하자면 일주문 격)로 새긴 것으로 짐작된다.
『왼쪽 '書者釋蕙○刻者釋曉禪', 오른쪽 '統和十三年乙未四月日'』
統和는 요(遼)나라 聖宗의 연호이고(983-1011) 통화13년이면 995년(고려 성종14년)에 해당한다.
단속사지(斷俗寺址) 단속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 두 가지 설이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는 경덕왕 22년 신충이 왕을 위해 지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경덕왕 7년인 748년에 이준(李俊)이 조연(槽淵)에 있던 작은 절을 큰 사찰로 고치고는 이름을 단속사 하였다는 것이다. 그 후 기록으로는 탁영 김일손이 지리산을 유람하며 적은 두류기행록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나오는데 당시에도 절이 황폐하여 승려가 거처하지 않는 방이 수백 칸이고 동쪽 행랑에는 석불(石佛) 5백 구가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단속사 인근에 살던 남명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지 언급한 것이 별로 없다.
폐찰은 언제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탁영이 단속사에 들렀을 때는 주지와 몇몇 승려가 거주하고 있었지만 남명이 들렀을 때는 그보다 더 쇠락했던지 "중은 굶어서 부엌이 싸늘하고, 금당은 낡아 구름에 파묻혔다"라고 했다. 게다가 남명의 제자인 성여신이 삼가귀감 문제로 절집에 불을 질러버린 이후 서산대사는 금강산으로 떠났으니 폐찰은 시나부로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두 차례 전란이 휩쓸고 지났다.
"매화가 올 겨울 추위에 죽었어요."
동네 아주머니가 정당매를 보러 가는 우리에게 지나가며 던진 말이다. 고려말 조선 초의 문신인 강회백(1410~1461)이 이 절에서 독서할 적에 손수 매화 한 그루를 심었는데 뒤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자 정당매라고 부르게 되었고 자손들이 대대로 북돋워 번식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그 나무는 백여년을 살다가 죽고 그 사실을 안 통정의 증손인 강용후가 1487년에 묵은 뿌리 곁에 새 뿌리를 옮겨 심은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라 한다. .
과연 매화는 죽어있고 매화를 보러 온 젊은 부부가 아쉬운지 마른 정당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600여년을 한 차례도 게으름 피지 않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던 정당매가 죽었다니...몇 년전 매화가 피었을까 하고 일부러 단속사를 찾았다가 꽃망울조차 맺지 못한 매화를 보고서 돌아선 적이 있어 인연이 없구나 하는 아쉬움이 앞선다. 다만 절터 입구에 남명이 사명당 유정에게 준 시가 돌에 새겨져 있어 옛 일을 더듬게 할 따름이다.
조연의 돌 위에 꽃이 지니 (花落槽淵石) 오래된 절 축대엔 봄이 깊었구나 (春深古寺臺) 이별할 때를 잘 기억해 두게나 (別時勤記取) 정당매 푸른 열매 맺었나니 (靑子政堂梅)
이번 산행은 남명이 놀던 백운동계곡과 천왕봉에서 산천재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끝자락의 남명 묘소와 선비정신을 상징하는 탁영대 그리고 선불교의 탯자리인 단속사지를 여행하는 일정이 되었다. 백운동천에 그 넓고 훤한 계곡물 위로 꽃잎을 떨구어 내던 노란 히어리 꽃무리들, '광제암문(廣濟?門)' 수려한 글씨, 천 년을 넘어 스쳐간 인연들을 묵묵히 지켜보며 그 터를 지탱해 온 아름다운 쌍탑, 겨울을 지나온 거친 바람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매화향기를 좇아 단속사지를 찾아들던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보고 듣노라면 산행이 때로는 여행이 되기도 하는 묘미가 지리산에 있음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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