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99에서
엉겅퀴님글을 옮겨 왔습니다.
○ 2017.9.12 13:30~9.20 05:00 (7박9일)
▷ 9.12 : 인천공항 → 네팔 카트만두
▷ 9.13 : 네팔 → 부탄 파로, 린첸풍 죵 관람
▷ 9.14 : 탁상곰파, 키츄라캉
▷ 9.15~9.18 : 드룩패스 트레킹(파로~팀푸)
▷ 9.19~9.20 : 부탄 → 네팔 → 귀국
○ 드룩패스(Druk Path) 트레킹 : 3.5일
- 걸은 거리 : 약 40㎞
- 고도 차이 : 최저 2,040m ~ 최고 4,210m
- 일행 4명, 국내여행사 인솔자 1, 현지 가이드 1, 요리사 1, 포터 1, 마부 1, 말 13필(여분의 말 3~4마리 포함)
1. 샹그릴라
‘샹그릴라’는 1933년 영국의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처음 등장하는 가상의 공간이다. 발췌 요약하면 이런 모습이다. 「히말라야 깊숙한 곳, 푸른 달의 계곡으로 불리는 곳에 세상과 격리된 평화롭고 아름다운 샹그릴라가 있다. 그곳에는 사원이 있고 라마승들이 일상을 수행으로 보내며 참된 지혜를 갈구한다. 그들은 전통의 가르침을 따르고 관대하며, 또 중용을 지키며 예절을 가르쳐 불화와 갈등을 예방한다. 책과 음악과 명상으로 기쁨을 누리고 살며, 세월이 가도 늙지 않는다.」
GNP(국민총생산) 대신 국민총행복(GNH : Gross National Happiness)을 국가지표로 도입한 세계유일의 나라, 국토의 60% 이상을 삼림으로 유지하도록 헌법에 명시한 나라, 체재비 등 관광수입이 제2의 국가재정이면서도 관광객 수를 늘리지 않는 나라, 전국민의 교육(의무교육 11년)과 의료가 무상인 나라, 국왕이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고 입헌군주제로 이행한 나라, 전통과 문화에 대한 무한한 자긍심을 가진 나라, 국민소득이 우리의 1/10도 안되면서도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나라… 부탄(Bhutan)
이미 중국에서는 관광정책상 소설 속의 지명인 샹그릴라로 개명한 지역도 2군데나 있고 주장하는 곳도 여러 곳이다. 그러나 지구상 마지막 남은 샹그릴라, 샹그릴라에 가장 근접한 곳은 부탄이라는 것이 부탄인들의 주장이다. 경치만 좋다고 샹그릴라가 될 수는 없다, 사는 사람들이 행복해야 샹그릴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부탄인들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맞다. 풍경만 뛰어나다고 어찌 청학동일까 보냐?
샹그릴라, 유토피아, 아틀란티스, 태양의 나라, 무릉도원, 청학동… 다 같은 뜻이다. 이상향, 지상낙원, 파라다이스. 누군가 그랬다. 이들의 공통점은, ‘그때 거기에는 있었지만 지금 여기에는 없는 곳’이라고.
2. 네팔을 거쳐 부탄으로 : 9.12~9.13
GNH 도입 이전, 은둔의 왕국으로 알려진 시절부터 그 깨끗한 자연 때문에 부탄은 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당시는 가는 길도 쉽지 않았고 그렇게까지 할 여유도 없었다. 지금 와선 좀 더 젊은 시절부터 돌아다닐 걸 하는 생각이 든다. 움켜쥐고 살았어도 재산을 모은 것도 아니고, 눈치 보며 살았어도 출세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유롭게 있는 것 다 털어먹고 갈 생각이다.
한번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으므로 네팔을 거쳐서 갔다. 남는 시간에 카트만두 시내의 보드나트 불탑을 구경하였다. 비교적 인도 초기 스투파의 원형을 간직한 탑이다. 상륜부 아래에는 사방에 부처의 눈이 그려져 있는데 삼라만상을 꿰뚫어보고 있는 지혜의 눈이다. 눈 밑의 코처럼 생긴 부분은 ‘최고, 제1’의 의미란다.
주변을 둘러보다 thangka라 적힌 곳이 더러 있어 들어갔더니 탱화(幁畵)를 그리는 곳이었다. 처음 알았다. 고대 산스크리트어로 thangka가 탱화인 것을. 티벳문화권인 티벳 네팔 부탄에서는 thangka(또는 thanka)라 한단다.
△ 네팔입국, 네팔 카트만두의 보드나트 스투파
다음날 카트만두를 떠나 부탄 국적기만 이착륙할 수 있는 국제공항 파로를 통해 부탄으로 들어갔다. 에베레스트를 보려고 1등석을 끊었는데 구름에 묻혀 제대로 보지는 못하였다. 재미있게도 항공권을 수기로 작성해서 주길래 기념으로 보관하였다. 파로는 협곡 사이 강이 흐르고 조금 여유가 있는 길쭉한 들판에 자리한 시골 소도읍 같은 분위기이고, 공항은 간이역 같았다. 해발 2,200m 전후. 벼농사와 허수아비는 우리랑 같았다.
△ 티켓, 부탄공항, 파로 시내
널찍한 호텔방에 짐을 풀어놓고 통상 ‘파로 죵(Paro Dzong)’이라고 부르는 ‘린첸풍 죵’을 관람하러 갔다. ‘보석으로 가득 찬 성’이라는 뜻이란다. 부탄의 죵(Dzong)은 적의 침략에 대비한 성(城)이라 할 수 있다. 거주와 방어, 행정관서와 사원의 역할을 겸하였다. 앞에는 파로츄 강이 흐르고 높은 언덕 위에 견고한 성채를 두른 요새의 모습이다. 뒤쪽 더 높은 곳에 있는 건물은 과거 파로 죵의 망루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중이다.
사원을 겸하고 있으므로, 방문할 때 부탄인들은 전통복장을 갖추어야 하며 외국인들도 복장에 제한을 받는다. 죵 안의 건물구조는 매우 복잡한데 일부는 지금도 행정관서로 사용한단다.
이 깃발은 라다라 한다. 라다는 사원‧죵 등 기념할 만한 장소에 거는데, 우리 사찰의 당간(幢竿)과 같은 것이라 보면 되겠다.
△ 밤에 보는 파로종
3. 탁상 곰파, 리추 라캉 : 9.14
탁상곰파는 부탄을 소개하는 사진에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곳이다.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 바위를 깎아 아슬아슬하게 자리한 곳이다. 탁상(Taktshang)이란 부탄어로 호랑이가 웅크린 곳의 뜻이란다. 8C에 부탄에 불교를 전한 파드마 삼바바(구루 린포체)가 암호랑이를 타고 날아와 명상을 하며 마귀들의 항복을 받아낸 곳으로, 온갖 신비한 얘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이후 17C에 그를 기념하여 절을 세웠다고 한다.
파로에서 차를 타고 산문 입구에 내려(해발 2,600m 정도) 고도 600m 이상을 가파르게 올라야 한다.
계곡 맞은편 꼭대기에 부속 암자 정도의 건물이 보였다. 전망이 좋을 것 같아 거기까지 올랐더니 문이 잠겼다. 거기서 보니 맞은편 더 높은 곳에 건물이 하나 더 있었다. 첫날부터 무리하지 말자고 하여 거기는 생략하였다.
내려와서 현지가이드가 하는 말이 합격이란다. 탁상 왕복은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고산트레킹에 대한 고소적응 훈련이기도 한데 이 정도면 별 문제없이 갈 수 있겠단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키추라캉이다. 키추라캉은 부탄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으로, 옛 티벳(당시는 토번吐蕃)을 최초로 통일한 7C 송첸캄포 왕이 왕국의 급소 108곳에 세운 사원의 하나라 한다. 당시는 티벳왕국의 영토였던 듯. 물론 당시의 건물은 아니다.
곰파(Gompa)와 라캉(Lhakhang), 모두 사원으로 번역하는데 현지가이드에게 어떤 차이점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설명을 잘해줬다. 명상을 위하여 깊고 고요한 곳에 위치한 것이 곰파이고, 수행을 위해 대중들이 접근하기 쉬운 곳에 위치한 것이 라캉이란다. 내 생각엔 초기불교의 아란야(阿蘭若 : 空閑處)와 비하라(僧院, 精舍)의 차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이로 인해 현지 가이드(*이하 텐징)에게 한층 신뢰가 갔다.
4. 드룩패스(Druk Path) 트레킹 : 9.15~9.18
① 트레킹 1일차(9.15) : 담체나(2,880m)~젤레죵(3,450m)~장출라카(3,780m)
드룩(Druk)은 부탄의 대표어인 종카어로 용(龍)이란 뜻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용의 자손이라고 생각한단다. 그것도 천둥의 용인 Thunder Dragon이다. 지금은 한국 관광객도 부탄에 제법 들어가고, 알음알음으로 고산트레킹도 가끔 하는 모양이지만 여행사에서 모객하여 이 코스를 가는 것은 우리가 처음이다. 텐징도 가이드 경력 18년에 한국사람 트레킹은 처음이란다. 이 길은 공항이 있는 부탄의 관문도시 파로에서 수도 팀푸까지 옛길을 따라 걷는 코스로 50㎞쯤 된다. 보통 5일 코스인데 우리는 4일 일정이기 때문에 해발 2800 이상까지 최대한 차로 접근, 거리를 단축하였다.
농장에서 짐을 말에 싣는 동안 우리는 먼저 출발하였다. 국내인솔자, 현지가이드, 요리사, 포터, 마부, 말까지 동원하니 우리가 무슨 거창한 해외원정 등반대 같았다.
참 부러운 것은 이 나라의 숲이다. 아름드리 원시림에 고산의 청정한 곳에만 자생하는 이끼류 라이칸이 축축 늘어져 있고 나무 아래엔 푸른 이끼가 빈틈없이 덮혀 있다.
숲을 지나 능선으로 올라서니 초원과 꽃밭이 펼쳐지고, 고갯마루에 서자 17C 티벳과의 전쟁시에 요새로 건설한 젤레종이 보인다. 이후 능선을 따라 길은 계속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한다.
점심을 먹고, 수십년 전 산불이 난 고사목 숲을 지나고, 한차례 소나기를 뚫고 오늘의 잠자리에 도착하니 지름길로 먼저 도착한 인부들이 텐트를 치고 있었다. 비는 곧 그쳤다. 텐트는 A형 텐트로 1인당 하나씩인데, 2사람이 자도 충분할 정도로 높고 넓다. 무거워 말이 아니면 운반하지 못하겠다.
왼쪽의 큰 텐트 2동은 식당과 인부들의 숙소이고, 식당에는 식탁과 의자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맨 오른쪽은 화장실인데,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변기 겸 의자를 놓았다. 그 기발하고 멋진 모습에 감탄하였다. 쪼그리고 앉아 볼일 보다가 이렇게 하니 산행 내내 쾌적하였다. 숙박지는 흡사 폐사지처럼 숲속에 반반하고 널찍한 공터가 있고 뒤와 좌우로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섰고 앞은 틔어 시원하며 저 멀리 물결 모양의 조산(朝山)이 아련하고 가까이에는 넘치는 샘이 있다. 천하의 명당이다.
텐징은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늑대를 보았다면서 사진 찍은 것을 보여줬다.
해가 질 무렵엔 구름이 완전히 걷혀 밤에는 쏟아지는 별을 기대해도 될 것 같았다. 과연 밤에는 별이 엄청났다. 얼마 만에 이런 광경을 보는 것인가? 은하수는 남북으로 길게 흐르고, 별이 너무 총총하여 아는 별자리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일부러 별을 보려고 밤새 여러번 텐트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문득 요즘 한반도의 시끄러운 상황과 관련하여 두보의 시 『세병마행(洗兵馬行)』의 마지막 구절이 생각났다.
安得壯士挽天河(안득장사만천하) 어찌하면 장사를 얻어 은하수를 끌어 당겨서
淨洗甲兵長不用(정세갑병장불용) 병기를 깨끗이 씻어 길이 쓰지 않게 할 수 있을까?
② 트레킹 2일차(9.16) : 장출라카(3,780m)~장출라 고개(4,180m)~지밀랑초 호수(3,880m)
여기도 야생화가 가장 화려할 때는 7월이라 하여 지금은 꽃도 끝물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꽃이 많다. 고산이라 바짝 엎드린 키작고 얼굴 작은 꽃들이 무수하다. 풀보다 더 낮게 피어 있는 늠도 있었는데, 멀리서는 잘 보이지도 않고 사진으로 찍어도 꽃밭을 제대로 나타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작은 꽃도 몸을 낮춰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술 암술 꽃받침 등 있을 것 다 있다. 이른바 꽃속에 우주가 들어 있다는 말.
▽ 오늘의 첫고개에서. 가이드 텐징 왕축(왼쪽)과 포터.
티벳지역에서는 텐징이라는 이름을 선호한다는데, 달라이 라마도 이름이 텐징이고 힐러리와 에베레스트를 함께 초등한 셀파 텐징 노르게이도 유명하다. 당신이 세번째로 유명한 텐징이냐고 했더니 웃는다.
가이드를 잘 만나는 일은 복이다. 그동안 성실하지 못한 가이드에 대한 안 좋은 기억도 많다. 특히 산악가이드는 관광가이드와 달리 오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맘에 드는 가이드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텐징은 교사를 하다가 가이드를 선택했고, 자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박식해서 막힘이 없고 어찌나 부탄을 알리려고 애쓰는지, 꼭 정부 홍보대사 같다고 내가 놀렸지만 모름지기 가이드는 저래야 한다 싶었다.
△ 국내여행사 인솔자(김시온 팀장).
내가 저 나이에 도저히 저랬을까 싶을 정도로 자기 생각이 단단하고 깊었다. 자기 일에 성심을 다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고, 그래서 ㅎ여행사를 다시 보게 되었다.
점심을 먹는데 우리 일행 외에 사람을 처음 만났다. 나이든 외국인 부부 같은데 달팽이처럼 아주 천천히 걷는다. 해지기 전에 숙소까지 갈 수 있을지 걱정된다.
저 멀리 비구름이 자욱히 몰려들었지만 다행히 우리를 비켜갔다.
몇 개의 고개를 넘고 능선과 초원을 거치고 늪지와 웅덩이 같은 작은 호수를 지나고 몇 번의 오르내림 끝에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지밀랑초가 보인다. 이 지역에서 초는 호수라는 뜻이다. 호수로 내려서니 샛길로 말을 몰고 온 인부들이 이미 텐트를 쳐놓았다.
맑은 호수에 알탕을 하고 싶었지만, 부탄인들은 산속의 호수를 신성시하여 소리도 지르지 않는단다. 그래서 알탕은 참았다. 사실은 물이 너무 차가웠다. ㅋ~
밥때가 일러 간식으로 술을 좀 마시는데 비가 내렸다. 밤에 캠파이어 할 수 있을지 적정했는데 비는 금방 그쳤다. 저녁을 먹고 어두워질 무렵 모닥불을 피우고 불 주위로 자리를 옮겼다. 호수의 사방은 높은 산이 둘러싼 성채 같았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하늘은 산에 갇힌 호수 같았다. 그 호수에는 은하수의 강이 흐르고, 온 하늘의 별을 모아 가두어 놓은 것 같았다.
아! 이 풍경을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네. 텐징은, 아무리 좋은 호텔이라도 시내에서는 별 다섯 개에 불과하지만, 이 캠핑장은 수십만 개의 별이 쏟아지는 호텔이라고 하였다. 나는, 텐징 당신은 시인이라고 말해줬다.
아직 이곳의 우기가 끝나지 않아 하루에 한차례 이상은 꼭 비가 내렸다. 고산날씨는 어린애 얼굴과 같아서 수시로 변한다는 말이야 알고 있지만 모닥불이 거의 사그라들 무렵 10시쯤 별이 총총한 걸 보고 들어갔는데 빗소리에 잠을 깨니 자정을 좀 넘긴 시간이었다. 그런데 아침에는 또 말갛게 개이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쉴 때 오는 비는 휴식이자 축복이다. 게다가 누워서 듣는, 텐트를 두드리는 빗소리는 또 얼마나 운치가 있는가! 멀리서 푸드덕거리는 말 물음소리도 아련하다. 우리의 텐트는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개울 옆 낮은 언덕에 위치했는데, 지리산 계곡물이 불어나듯 시내가 넘쳐 피신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에 잠을 설친 일행이 있다 해서 나는 놀랐다. 걱정도 참 팔자지.
③ 트레킹 3일차(9.17) : 지밀랑초(3,880m)~제니초(4,110m)~심코타초(4,120m)~라바나 고개(4,210m)~
파조딩 고개(3,780m)~야영장
최초로 8000m급 안나푸르나를 등정한 모리스 에르조그(1919-2012)는 산을 흰산과 푸른산으로 구분하였고, 등반은 만년설이 쌓인 흰산을 길이 없는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트레킹은 푸른산을, 길이 있는 산을 걷는 것이다.
우리가 걷는 코스는 길도 뚜렷하고 갈림길도 많았다. 파로~팀푸간의 최단거리도 아니니 옛사람들이 왕래하던 길도 아닐 것 같고, 이 높은 곳에 나무꾼도 올 것 같지가 않고, 이 나라엔 약초꾼도 별로 없는 걸로 아는데 이 길은 누가 만들었냐고 물어봤다. 텐징은 야크를 치는 사람들이 야크를 몰고 오르내리는 길이란다. 그렇다면 말이 된다. 그 길들을 연결하여 트레킹코스로 개발한 것이란다.
오후에는 내내 날씨가 흐리고 비가 흩뿌리기를 반복했다. 맑은 날이면 많은 설산을 볼 수 있다 했는데, 내 정성이 부족했나? 여기 산은 해발 4,000m 부근에서도 늪지대 비슷한 데가 많아 물이 풍부하다. 신기하다. 우기에는 호수가 생겼다가 없어지기도 한단다. 그런 늪과 호수를 몇 군데 지나고 마지막 라바나 고개로 올라서기 전 드디어 한쪽 하늘이 열리더니 설산이 얼굴을 내민다. 캉붐 설산이다.
우리가 부탄 트레킹 가자고 했을 때 거기까지 가서 에베레스트 정상도 못 보고 오는데 왜 가느냐고 하는 늠이 있었다. 천왕봉 안 올라가면 지리산 안 간 거라고 생각하는 거와 같다. 에베레스트 밑에 가도 항상 에베레스트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듯 이 정도만 해도 감동이다.
이승의 세상에 이바지한 바도 없고 전생에 무슨 덕을 쌓은 것 같지도 않은데 무슨 공덕으로 이렇게 눈호강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일행 중 한사람이 자기는 아무래도 무임승차한 것 같다나?
△ 제니초, 심코타초 호수
Korea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가 몇 m냐고 해서 백두산 2,744m라고 하니, 여기서는 그 정도면 전망좋은 카페 하나 차릴 수 있겠다 생각한단다. 6,000m 이하의 봉우리는 이름도 없단다. 만년 설산만 이름이 있는 모양이다. 우리보고 봉우리 이름 하나씩 붙여달란다. 우리나라에 4000m 이상 되는 산 하나만 있었어도, 수목한계선을 초과하는 고산초원이 있고 연중 대부분을 머리에 흰눈을 이고 있는 산이 있었다면 나는 볼 것도 없이 그 산 아래에서 가이드나 하며 살았을 것이다.
날씨도 흐리고 전망도 많지 않아 머뭇거리거나 쉬기도 애매하여 시간이 단축되었고, 텐징이 이왕 내일 아침 부탄 최고봉(7,541m)를 멋있게 볼 수 있는 곳까지 가서 텐트를 치자고 하여 예정보다 훨씬 더 진행하였다. 웬걸, 진행해도 너무 많이 나아가 팀푸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잠자리를 정하게 되었다. 이건 아니지. 여기까지 온 것은 깊고 고요한 곳에서 잠자기를 원한 것이지 시내 가까운 곳이라니. 최고봉 조망이야 지나가면서 보면 되지. 나중에 텐징에게 말해줬다.
④ 트레킹 4일차(9.18) : 야영장(3,200m?)~모티탕(2,040m) → 팀푸
어제 진도를 많이 뺀 덕분에 남아 있는 거리가 많지 않고 내리막길만 남아 트레킹 기분은 별로 나지 않았다. 허나 저 아래로 팀푸가 내려다보이는데도 가파른 길을 내려오는 데 2시간 반쯤 걸렸다. 밤새 내린 비로 길은 질척거리고 미끄럽고 또 말 발자국으로 패여 걷기가 아주 까다로웠다. 내려와선 현지여행사에서 준비한 특별한 만두와 맥주를 들이키며 무사완주를 자축하였다.
다들 4~5,000m를 몇 번 다녀와서 그런지 이번에는 아무도 타이레놀이나 다이아믹스 또는 비아그라를 찾는 사람이 없었다. 식사도 내가 강요하지 않아도 잘 먹는 편이었다. 사실 고산길을 걷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힘들어 밥맛도 없는데다 현지음식은 느끼하여 입에도 맞지 않고, 그 좋은 술도 마다할 때가 많다.
그런데 국내 인솔자가 아침저녁으로 직접 주방텐트에서 한식을 요리하여 내놓음으로써 음식에 관한 애로사항이 거의 없었다. 남들은 이런 트레킹을 마치고 나면 몸무게가 몇 ㎏씩 빠져서 돌아간다는데 나는 잘 먹고 잘 자 몸이 불어서 갈 것 같다. 세상은 갈수록 어려워지는데, 나 혼자 이렇게 몸무게가 늘어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또 하나 트레킹 내내 감동스러운 것이 있었다. 현지인이 아침마다 출발시에 갓 밥을 지어 밥과 반찬을 보온 찬합에 넣어 포터가 광주리를 지고 따라와서는 점심 때 내려놓으면 온기가 남아 있었다. 거기에다 끓인 물을 보온통에 담아와 뜨거운 차를 함께 내놓았다. 이때까지 해외산행시 점심은 대부분 서늘한 주먹밥 하나 배낭에 넣어가서 살기 위해 억지로 삼켰는데, 이런 점심이라니! 나는 따신 밥을 먹어야 힘을 쓰는데, 그래서 국내에서는 한여름에도 보온도시락을 싸갖고 다니는데 어떻게 알고···. 고맙구로!
간식과 점심을 짊어지고 따라오는 저 친구는 20살 총각, 제촙이다.
팀푸로 이동하여 호텔에서 씻고 점심 먹고 메모리얼 초르텐과 大佛을 관람하고 시내구경을 하고 텐징과 그의 회사 보스와 함께 만찬을 즐기고는 일정을 끝냈다.
5. 풍경 몇 가지
① 개팔자 상팔자
부탄은 불교국으로 살생을 않는다. 소고기는 먹지만 외부에서 들여온다. 그러니 소들은 말 그대로 천수를 다 누린다. 천수를 다한 소는 식용으로 사용하기도 한단다. 말은 인간에게 노동력을 착취당하기도 하니 천국은 아니다. 개들이야말로 천국의 주인공이다. 온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거나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널브러져 사람이 건드려도 꼼짝도 않는다. 밤 되면 영역다툼으로 짖기도 한다.윤회설에 의해 개는 사람으로 태어나기 전단계이고, 인간이 신들의 노여움을 사서 쫓겨났을 때 개가 사람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는 부탄 신화도 한몫했단다. 그래서 개고기는 먹지 않는다. 개체수가 너무 많아 문제가 되어 잡아다가 중성화를 시키기도 한단다. 그러거나 말거나 저놈들에게 무슨 고민이 있겠나? 목표관리가 있나, 인사고과가 있나, 골통 짓하는 부하직원이 있나, 맘에 안 드는 상사가 있나, 취직 걱정하는 자식이 있나, 말 안 듣는 남편이 있나? “개팔자 상팔자”라는 말은 부탄의 개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말 같다. 텐징에게 당신네 나라에선 사람보다 개들의 행복지수가 더 높을 것 같다고 했더니, 자기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② 새싹
처음 나는 Bhutan은 불교국이라 Buddha에서 온 말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산스크리트어 Bhotant에서 온 말로 티베트의 끝, 높은 땅이란 뜻이란다. 또는 Bhotsthan이라고도 하는데 티베트로부터 온 사람이란 뜻이다. 그래서 넓게 볼 때는 티베트문화권에 속하는데, 그들의 전통복장도 옛 티벳의 복장을 변형한 것이라 한다. 남자옷 ‘고’는 스코틀랜드 남자 치마와 약간 닮았고, 여자 옷 ‘키라’는 우리나라의 치마 저고리와 흡사하다. 특히 키라를 입은 어린 학생들은 참으로 귀여웠다. 물론 키라를 입은 이쁜 여인도 있었다.ㅎ~
부탄은 유치원(1년) 포함 초·중·고(10년)까지 의무교육으로 무상이다. 물론 대학도 국립은 무상이다. 수업료 뿐만 아니라 교과서 학용품 기숙사도 무상이다. 학교마다 거의 통학버스도 있다. 이게 과연 국민소득 2천 몇백 불의 나라가 할 수 있는 일인가? 어린이들의 무상급식을 포퓰리즘이니 좌익이니 등 희한한 논리로 반대하며,
눈물로 호소하며 시장직을 거는 나라와는 사뭇 다르다.
어린 학생들 얘기를 하다 보니 오버랩되는 장면이 있다. 도로가에 나무틀을 짜 보호하고 있는 것은 묘목이다. 소나 말 양이 뜯어먹지 못하게 하고 클 때까지 사람이 관리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란다. 종교적으로 나무도 생명체로 간주하여 함부로 베지 않으며, 한 그루를 베면 2그루 이상을 심는 식이란다. 이런 자연보전 교육을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가르치고.
③ 남근 숭배
일반 가정집이나 가게 입구에 남근 모습을 장식한 경우가 많았고 기념품 가게에도 남근 상품이 즐비하다. 묘사가 너무 적나라하여 민망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남근숭배는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세계공용어다. 더하여 부탄에서는 악귀 추방의 주술적 도구로 쓰였다고 한다.
④ 풍경사진 하나
부탄에서의 마지막 날 저녁, 레스토랑에 아주 멋진 풍경사진이 하나 걸려 있었다. 물 좋고 정자 좋은 저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중부 어디라 했는데 이름은 잊었다. 원래 비행장을 건설하려고 했는데 사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단다.
그들의 얘기는 이랬다. “부탄에서 이 정도의 풍경은 흔하다. 그렇지만 이런 풍경은 개인이 독차지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지을 수 있는 건물은 죵이나 사원 밖에 없다. 이보다 나은 곳도 많지만 여기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으므로 비행장 건설은 안된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곳곳에 사진을 걸어놓았다.” 호텔로 돌아오니 복도에도 그 사진이 있었다. 부탄 사람들, 참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⑤ 부탄의 술
대체로 산 위에서는 가져간 소주를 주로 마시고 시내에선 현지 술을 마신다. 부탄에서 생산되는 위스키 3종류와 맥주 2종류, 그리고 그들의 전통주 ‘아라’를 마셔봤다. 기억할 만한 술은 없었다. 소주를 포함한 증류주를 아랍어로 아라끄(아락), 인도에서는 알락, 옛 중국에서는 아랄길주, 몽고말로 아리킬, 만주어로 알키, 평안북도에서는 아랑주, 개성에서는 아락주라 불렀다 하는데, 다 알콜의 어원과 관련 있는 말이다.
아라주, 그 이름은 매우 반가웠으나 맛은 별로였다. 아라는 안동소주처럼 약간의 화근내(불냄새)가 나면서 물을 섞은 맛이 났다. 설마 물을 탔겠나, 증류기술이 부족한 거 아닌가 하는 얘기가 나왔다. 그 얘기를 했더니, 아라는 쌀 보리 밀 등으로 담그는데, 시골로 들어갈수록 제대로 된 아라의 술맛을 느낄 수 있단다.
음주에도 제한을 두고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렇지는 않고 부탄인들이 너무 술을 좋아해서 정부에서 음주를 억제하는 정책을 시도한 적은 있다고 한다. 현지여행사 사장의 말이 재미있다. 술은 부탄인들의 행복지수를 높이는 데 기여한 바 크다고 생각한단다. 우리도 오랜 옛날부터 음주가무(飮酒歌舞)를 즐겼고, 그건 중국 역사책에도 기록되어 있다고 하니, “오우!” 하는 반응과 함께 당장 대답이 돌아왔다. 인사동 막걸리! 강남스타일!
텐징은 한국의 소주맛이 'very good'이란다. 내친 김에 나는 폭탄주(bomb shot)도 가르쳐주고, 건배 후에는 one-shot을 해야 한다고 직접 시범도 보여주었다. 소주 맥주 위스키 폭탄주 모두. 연암 박지원 선생의 열하일기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주점에는 서넛 혹은 대여섯이 끼리끼리 둘러앉았는데 모두 몽골족이나 회족들이요, 무려 수십 패였다. 두 오랑캐들의 생김생김이 사납고도 더러워서, 올라온 것이 후회가 되기는 하나, 이미 술을 청했는지라 그 중 한 좋은 교의를 골라서 앉았다. 점원이 와서, “몇 냥(兩)어치 술을 마시렵니까?” 하고 묻는다. 여기서는 술 무게를 달아 파는 것이다. 점원이 가서 술을 데우려 하기에, 나는, “데워선 못 써. 찬 것 그대로 달아 와.”했더니, 점원이 웃으면서 부어 와서 먼저 작은 잔 둘을 탁자 위에 벌여 놓으므로, 나는 담뱃대로 그 잔을 쓸어 엎어 버리고, “큰 술잔을 가져 와.”하여, 모두 부어서 단번에 다 들이켰다. 뭇 되놈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다. 대개 내가 쾌하게 마시는 것을 장하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중국의 술 마시는 법이 매우 얌전해서, 비록 한여름에라도 반드시 데워 먹을뿐더러, 심지어 소로(燒露 소주)라도 끓이며, 술잔은 은행 알만한데도 오히려 이빨에 대어서 조금씩 마시고, 탁자 위에 남겨 두었다가 때때로 다시 마시며, 단번에 쭈욱 기울이는 법이 없고, 되놈들도 이와 같아서, 세속에서 이른바 큰 종지나 사발에 따라 마시는 일은 아주 없었다. 내가 찬 술을 달래서 넉 냥쭝을 단숨에 마신 것은, 이것으로 저들을 두렵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대담한 척하려 함이니, 이는 실로 겁쟁이 짓이요, 용기가 아니었다. 내가 찬 술을 달랄 때 여러 되놈들이 이미 3분(分)쯤 놀랐는데, 단번에 마시는 것을 보고는 크게 놀라서, 도리어 저쪽에서 나를 두려워하는 기색이다.
주머니에서 8푼을 꺼내 술값을 치르고 나오려는데, 여러 오랑캐가 모두 교의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한 번 앉기를 권하고는, 그 중 한 사람이 제 자리를 비워서 나를 붙들어 앉힌다. 저들은 호의로 하는 것이나, 나는 벌써 등에 땀이 배었다. 한 되놈이 일어나 술 석 잔을 부어 탁자를 두드리면서 마시기를 권한다. 나는 일어나 그릇에 남은 차(茶)를 난간 밖에 버리고는, 그 석잔을 모두 부어 단숨에 쭈욱 들이켜고, 몸을 돌려 한 번 읍한 뒤 큰 걸음으로 층층대를 내려오는데, 머리끝이 주뼛하여 무엇이 뒤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
연암은 조선 남아의 호기를 보여줬는데, 나는 단지 나이 들어도 철들지 않은 한국 술꾼의 객기를 보여줬을 뿐이다.
6. 마무리
부탄사람들은 대체로 친절하고 순박하며 농업사회의 공동체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착한 개인이 모여서 조직을 이루면 그 조직도 착할 거라는 생각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했거나 무지의 소치일 것이다. 세상에 착한 국가가 존재하던가? 국익을 따를 뿐이다. 조직이나 사회단체라고 크게 다를까?
지금은 부탄에는 교통신호등조차 없지만 언제까지 없을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인구의 도시 유입으로 주택과 일자리 문제, 실업률, 빈부격차와 계층간 차별, 도농(都農) 및 동서부 지역간 불균형 발전, 남부지역의 외국인 유입으로 인종 및 종교적 갈등, 외부세계와의 접촉으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과 정체성 혼란, 국왕에 대한 지금의 존경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이제까지 경험해본 적이 없는 잠재되어 있는 수많은 문제들이 터져나올 것이다.
게다가 늑대 같은 강대국 사이에 끼어 지금은 적절히 균형외교를 하고 있지만, 티벳(*1950년 중국점령)과 시킴왕국(*1975년 인도합병)의 경우에서 보듯 그들의 GNH는 꽃을 피워 보지도 못하고 사그라들 수도 있다.
사실 그들이 들고 나온 GNH라는 것도 별다른 산업을 육성할 수 없는 약소국의 입장에서 GNP 증대라는 무한경쟁에 뛰어들 수 없기 때문에 나온 고육지책일 수도 있고, 강대국 사이에서 독립을 지키려고 문화와 전통으로 정체성을 유지하겠다는 궁여지책일 수도 있다. 사회가 비교적 단순하고 인구가 80만도 되지 않으니 그런 실험적 정책도 가능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세계화나 창조경제처럼 구호에 그치지 않고 목표를 향해 하나하나 착실히 실천한다는 사실이다. 의료 교육 환경보호 불교철학의 생활화 등이다.
이 아름다운 나라의 새로운 시도가 성공하기를 나는 간절히 빈다. 사실 부탄의 성패는 내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하지만 외세의 간섭이든 내부의 붕괴든 지구상의 마지막 희망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인류의 미래가 너무도 암담하지 않겠는가? <끝>
<ps> 사진은 같이 간 일행의 사진을 많이 빌려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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