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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바이능선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조영남이 부른 화개장터란 노래는 조영남이 한 번도 가보지 않고 주워들은 이야기로만 기타 쳐가며 작사작곡했다고 한다. 그 덕에 화개장터는 유명해졌지만 화개장터에서 약 25km정도 지리산으로 들어가면 화개면 대성리 의신마을이 나온다. 조선 중기에 의신사란 규모가 큰 절집이 있었으나 지금은 자취가 없고, 마을이 조성되어 등산객들을 대상으로 민박을 하며 약초와 농사 등을 일구며 사는 동네다. 마을 뒤로 벽소령으로 올라가는 빗점골, 영신봉으로 오르는 대성골 등이 있어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이 연중 몰려드는 곳이다.
의신마을 전경. 의신사가 있던 곳이다. "선비가 태어나서 한곳에 조롱박처럼 매여 있는 것은 운명이다. 천하를 두루 보고서 자신의 소질을 기를 수 없다면 자기 나라의 산천쯤은 마땅히 탐방해야 할 것이다." 1489년(성종 20년) 성종 4월 탁영 김일손이 정여창 등과 지리산을 유람하며 쓴 두류기행록에 나오는 글이다. 김일손은 중산리로 올라 천왕봉과 영신봉을 거쳐 의신사로 내려왔다. 의신사는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고 다만 의신마을 뒷편 외진 덤불속에 부도 한 기만 남아 그 흔적을 기억할 뿐이다. 탁영은 의신사에 잠시 쉬었다가 간 흔적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산 정상(영신봉)에서 서둘러 하산하여 정오에 의신사에 닿았다. 의신사는 평지에 있었다. 승려 30여 명이 정진하고 있었다. 대나무 숲과 감나무 밭 상사이에 채소밭이 있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인간 세상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머리를 돌려 청산을 바라보니 안개와 노을이 드리우고 원숭이와 학이 노니는 선경仙境을 떠나온 회포가 가슴속에 밀려들었다. 주지 법해法海는 참다운 승려였다. 잠시 쉬었다 길을 떠났다." 유림으로서 한 성깔 한 김일손이 스님 볼 줄도 알았던 모양이다.
傳法海堂 부도 하동문화원에서 펴낸 '하동의 문화유적'에는 의신사지를 소개하며 "마을 윗산 중턱에는 法海라고 새겨진 부도가 세월의 무상함을 말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부도에 새겨진 글은 마모되어 *每堂이라고 어렴풋이 보이는데, 法海堂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고 다만 그렇게 추측할 뿐이다. 통돌로 이루어진 부도 형태로 보자면 조선중기 즈음으로 보이는데 성종 때의 탁영 김일손이 이곳 의신사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눈 법해스님의 부도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이재구는 연대상으로는 비슷하게도 보이나 堂號는 法號에만 붙이는 것이니 '법해당'이란 성립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法海는 법명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산대사의 법명은 휴정休靜이고 법호는 청허淸虛이니 청허당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법해당이란 이를 휴정당이라 부르는 것과 같아 맞지 않다는 것이다. 우쨋거나 의신마을 뒷산에 달랑 남은 부도 한 기만이 수백 년의 바람을 맞으며 생전 고독한 수행자의 면면을 아직까지 담담하게 감당하고 있다.
철골은 삼철굴이 이 골짜기에 있었기에 붙은 이름인데 철골을 따라 올라가니 능선 중턱에 눈맛이 좋은 전망대가 있고 그 옆에 암자터로 보이는 곳이 있다. 잡목이 우거져 시야가 가려져 있으나 전망이 좋은 곳이다. 서산대사의 청허집에는 “삼철굴(三鐵屈)에 들어가 세 여름 안거를 지냈고, 대승사(大乘寺)에 들어가 두 여름 안거를 지낸 다음, 의신·원통·원적(圓寂) 등의 여러 암자에서 이삼년을 놀았다”고 말하고 있다. 원적암을 빼면 절은 전부 화개동 의신골 안에 있다. 벽소령 산장이 눈에 들어온다. 의신에서 벽소령을 넘어서면 함양의 삼정마을로 내려선다. 덕평봉 아래 평평한 곳이 옛날 사람들에게 청학동 중의 하나로 불리던 곳이다.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란 말이 있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말이다. 공자가 제자들과 더불어 수레를 타고 여행을 하다 태산 근처에 이르렀을 때, 깊은 산 속에서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와 사연을 알아보게 했던 바, "이곳은 참으로 무서운 곳입니다. 옛날 시아버자가 호랑이에게 물려 갔고, 이어 남편과 자식이 모두 물려 죽었습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렇게 무서운 이 곳을 왜 떠나지 않느냐고 묻자, "여기는 그래도 가혹한 세금에 시달릴 걱정이 없기 때문입니다."하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공자는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사나운 것이다."라고 한데서 나온 말이다.
선비샘에서 조금 돌아가 바람을 막아주는 바위 아래 눈을 치우고 점심을 먹었다. 반야봉과 중봉(뒤편)과 앞의 명선봉이 묘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겨울산은 맑고 고요하다. 하늘이 맑고 바람이 맑고 숲이 맑다. 은밀한 속살의 잔주름마저 내비친 겨울산에 서면 모진 바람이 귓전을 때려도 거칠게 느껴지지 않는다. 숨김이 없다. 그래서 겨울산은 사람의
화개에서 의신마을로 올라오는 도로
원통암. 의신마을 동북쪽 1.5km지점에 있다. 원통암 옛터에 1997년 칠불사 東林스님이 새로 지었다. 서산대사가 15의 나이에 同學들과 지리산에 산천구경을 들어와서는 崇仁長老의 권유로 삼년을 눌러앉게 되었는데 "차라리 일생을 어리석은 놈이 될지언정 글을 다투는 法師는 되지 않으리라"며 은장도로 스스로 해묵은 머리를 잘랐다. 스님은 이 곳 원통암이 서산대사가 머리를 깍은 곳이라 했다. 圓通이란 '두루 통한다'는 의미로 이런 법당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이다. 사바세계 중생들의 모든 고통을 꽤 뚫고 있어 중생들의 고통을 두루 해결해 준다는 뜻이다. 법당에 삼배를 올리고 나오니 스님은 뭐 줄 것 없나 찾다가 만두 2봉지를 내 놓는다. 대게 이런 심심산골 외딴 암자에 수행하는 스님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용할 식량이다. 그런 소중한 양식을 선뜻 지나는 산객을 위해 내놓다니 송구할 따름이지만 거절할 수도 없기에 배낭에 넣었다. 지허스님이란 분이 1973년에 쓴 '선방일기'란 책에는 절간에서 얼마나 식물이나 시주물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전해온다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 어느 도인이 주석하고 계시는 토굴을 찾아 두 衲子가 발길을 채촉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토굴에서 십리쯤 떨어진 개울을 건너려고 할 때 시래기 잎이 하나 떠내려 왔다. 그러자 두 납자는 발길을 멈추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흥, 도인은 무슨 도인, 시래기도 간수 못하는 주제인데 道는 어떻게 간수하겠어. 공연히 미투리만 닳게 했군' 하면서 두 납자가 발길을 되돌려 걷자 '스님들, 스님들, 저 시래기 좀 붙잡아 주고 가오. 이 늙은이가 시래기를 놓쳐 십리를 쫒아오는 길이라오.' 두 납자가 돌아보니 노장스님이 개울을 따라 시래기를 쫒아 내려오고 있었다. 시래기를 붙잡은 두 납자의 토굴을 향한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해서리 산을 드나들 때 차가 들어가기 힘든 외진 암자가 있으면 쌀 한 봉지라도 배낭에 메고가 시주라도 해야 하는데 오히려 얻어 먹다니 송구할 따름이다.
원통암 담너머로 보이는 풍경 겹겹첩첩 긴 화개골을 지나고 섬진강을 건너 보이는 백운산은 깨달음을 구하는 자가 언젠가 도달해야 할 彼岸이 되어 물끄러미 마주보고 서 있다. 좋은 절터에서 보는 아름다운 풍경은 경전 몇 줄을 읽는 것보다 더 감동적이다. 산과 숲과, 바람이 지나는 소리, 능선 위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는 구름, 이 모든 시방세계가 화엄세계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산행도 서산대사의 자취를 따라 산행을 했다. 세 번의 여름을 났다는 삼철굴이 있는 철골, 스스로 머리를 자른 원통암 등. 지리산에는 선인들의 녹록치 않는 삶의 흔적들이 녹아있기에 앞서간 그 발자국을 어지럽히지 않고 더듬어 보는 것도 자신을 되돌아보는 의미있는 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산행기를 적는 것도 그런 것이고....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은 앞서 간 이들의 발자취가 아니라 그분들이 찾고자 했던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외부에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이미 존재해 온 우리 자신이다." 법정스님 말씀이다. 화개동에 꽃이 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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