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리산모음

지리산 잔돌(세석)평전

by 하얀 사랑 2011. 2. 18.

지리산 잔돌평전의 구절초
[염기훈 2010/09/16 08:39 / 조회수:505 / 추천:5]

 

산행일자 :  2010.9.10 
날      씨 : 흐림
산 행  자 : 이재구 송건주 한영택 김경환 염기훈
산행시간 : 11:40
산행코스 : 거림(07:30) - 도장골 - 와룡폭포 - 시루봉 -청학연못 - 촛대봉샘(점심) - 촛대봉 - 연하봉 -                 일출봉 - 일출능선 - 와룡폭포 - 도장골 - 거림(19:10)

   세석평전細石平田은 우리말로 잔돌평전이라고도 하는데 드넓은 평원에 가을이면 쑥부쟁이, 구절초 등이 만개하여 온 산이 가을꽃으로 천상의 화원을 이룬다. 고원지대인지라 꽃들은 기온에 맞추어 재빨리 피었다 지 때문에 세석의 가을꽃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때를 맞추어 가야한다. 하루가 여삼추라고  산속의 하루는 세번의 해가 바뀌 듯 변화가 심하기 때문에 좋은 구경을 위해서는 적절한 때를 놓쳐서 아니된다. 세석의 가을 구절초 산행을 하자는 이야기는 작년 9월말 지리산 태극북부능선을 하면서 이재구가 바래봉에서 했던 말이다. 세석의 구절초 산행은 그렇게 일여 년의 기다림 끝에 시작되었다. 요즘은 노고단의 원추리 무리도 그렇지만 세석의 넓은 평원들도 잡목들에게 많이 잠식 당하여 천상의 화원도 옛만 못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망상을 한다. 옛날 화전민들이 불을 놓아 농사를 지었기에 오늘의 세석평전이 있듯이 나도 꽃불을 놓아 꽃무리 위 그늘을 없애고 바위 틈 키 작은 꽃들이 바람과 이슬을 맞으러 허리를 추스리며 일어설 수 있도록 ...                 

  거림골과 도장골의 갈림길 인근 길상암
  도장골과 거림골은 길상암 아래에서 합쳐진다. 20년 전인 1990년 10여명이 촛대봉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밤 2시에 거림에서 길을 나서 거림골로 가려다 지나쳐 이 길 도장골로 들어선 듯 하다. 이후 지리산 밤길을 어딘지도 모르고 무작정 오르기만 했으니 일출은 커녕 시루봉도 못가서 해는 중천에 떠오르고 하릴없이 세석을 거쳐 촛대봉을 다녀온 기억이 생생하다.   

 거림마을의 길상암 위 도장골의 빨치산 환자비트 표지. 내원골의 새댁 정순덕이 남편을 찾아 입산하여 빨치산 활동을 시작했던 곳이라 한다. 환자트는 지리산 중에서도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발견되지 않게끔 교묘하게 만들어 놓았고 그 소재지는 비트(비밀 아지트)라는 말대로 빨치산 내에서도 극비에 붙여졌다. 빨치산은 월동준비를 위해 하동의 악양을 공격 상당량의 식량을 확보하여 이 곳으로 운반하여 온다. 그것에 대하여 이태의 남부군에 다음과 같은 자세한 기록이 있다.  

  1951.11.27 밤 사이 남부군 81사단은 구재봉 능선에, 92사간은 형제봉 능선에 진출하여 악양분지를 차단하고 57사단이 소재지 마을에 들어가 경찰대의 보루대를 포위했다.

 이날 아침 산과 들에는 허옇게 서리가 깔려 고무신을 신은 발등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81사단 지휘부는 구재봉 중턱에 자리잡고 아래 위에서 벌어지는 공방전을 관전했다. 구재봉 정상에는 802연대가 바위를 의지하고 하동방면에서 재빨리 내원한, 분명히 국군부대로 보이는 공격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분지 저편 형제봉 능선의 92사단 역시 구례, 광양방면에서 급거 출동한 군경부대와 격전을 벌이고 있고, 구재봉 아래에서는 57사단이 박격포 사격까지 하면사 수비대를 포위, 공격하고 있었다.

  전투는 일진일퇴하면서 하루해가 저물고 밤이 되었다. 신호탄이 아래위에서 꽃밭을 이루었다. 그 사이 교도대를 비롯한 비전투요원들은 분지내의 마을들에서 식량을 거둬 가지고 북쪽 청학이골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그런 대치상태가 나흘동안 계속되고 빨치산 쪽은 목적한 대로 상당량의 월동대책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소설 '토지'에도 나오는 지리산 자락 악양 평사리 너른 벌판에서 수확되는 식량을 산속 빨치산들이 가만히 놔둘리 없었겠지만 그러나 이 전투는 남부군의 면소재지급 취락에 대한 마지막 공격이 되었다고 한다. 강력한 국군부대의 공세를 만나 사상자만 많이 내고 학동골까지 져 올린 월동대비 식량의 태반을 뺏겨버린 적자싸움이 그 결산이며 이후 남부군이 급속한 쇠락의 길로 들어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이태는 술회하고 있다.  

  이 전투 와중에 가슴아픈 이야기 하나
  다리 한 짝이 파편에 잘린 앳된 얼굴의 대원이 피를 쏟으며 신음하고 있었다. 이미 의식이 없는 듯 보였다. 권총을 찬 간부 한 사람이 문득 멈춰 서더니 소년을 껴안았다. 소년은 무슨 환각을 느꼈던지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기어들어 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머이요. 어머이....."
  "그래 어머이한테 가거라. 가서 편히 쉬어라. 인제 네가 할 일은 다했다."
  대장은 한 손으로 소년을 끌어 앉은 채 권총을 빼어 들었다. 소년의 머리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옆눈으로 그것으로 보며 나는 대열이 흩어져 올라가는 방향으로 무턱대고 뛰었다.
  국군은 잠시만에 학동골을 점령하고 남부릉으로 추격해 올라왔다. 그러나 빨치산들은 그보다 훨씬 빠르게 거림골을 향해 바람처럼 행적을 감추고 말았다.  

  소년이 이념이 뭔지 알고 빨치산이 되었을까마는.... 이태는 거림골과 도장골을 구분하지 않았지만 이것이 거림골(도장골) 빨치산 비트 표지판에 기록된 악양에 관한 이야기의 전말이다. 

 용소

 

 와룡폭포는 도장골에서 가장 웅장하고 폭포의 폭이 넓어 아름답다. 이 번 산행로는 도장골에서 쭉 골짜기를 따라 올라오다 와룡폭포 위에서 조금 더 진행하다 좌측 능선을 타고 시루봉으로 오른다 

 

  시루봉. 절벽을 타고 올라서면 드넓은 세석평원과 촛대봉, 천왕봉 등이 손에 잡할 듯 장관을 이루는 곳이라 하는데 오늘은 안개가 끼어 전망이 없다.   

 큰용담.  용담에는 칼잎용담과 큰용담,  마~ 용담이 있다 

 시루봉 인근의 청학굴. 옛날 도인이 도를 닦았던 곳이라고 한다

 

 

 산오이풀

 

 

  세석평전 아래 청학연못. 물풀이 자라 물위를 덮고 있지만 재구가 전에 왔을 때는 물위로 푸른 하늘이 맑게 비치어 환상적이었다고 한다. 연못에 거꾸로 비친 풍경이 아름답다. 
  청학연못은 웬만한 지리산꾼이라도 잘 알지 못하는 곳이라 한다. 시루봉을 지난 이재구가 청학연못으로 안내하며 세석평전아래 청학연못은 아주 옛날부터 세석평전에 들어와 살던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반은 자연적 반은 인공적으로 조성한 흔적이 남아있다. 이런 곳에 연못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왜 靑鶴연못일까?
 
학동은 요새말로 이상향(유토피아)이다. '유토피아'는 Nowhere 즉 어디에도 없는 곳이란 뜻이다. 일찍이 <정감록>에서는 "진주 서쪽 100리, (중략) 석문을 거쳐 물 속 동굴을 십리쯤 들어가면 그 안에 신선들이 농사를 짓고 산다"고 했으며, 이를 본 고려 때의 이인로, 조선 시대의 김종직과 김일손, 유운용 같은 이들이 청학동을 찾아 나선 일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인로는 <파한집>에서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청학동은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데 들어가는 입구에 폭포가  있고 폭포를 지나면 석문 (石門)이 나오고 또 석문동굴 (石門洞窟)을 따라 10리쯤 들어가면 주위가 40리나 되는 넓고 평탄한 지역에 신선들이 살고 있는 별천지가 있으며 석정(石井)이 있고 뒤에는 삼신봉 (三神峯)이 높이 솟았으며 석각삼봉(石角三峯)등이 병풍처럼  둘러서고 해바위와 달바위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청학동은 땅이 기름져 곡식이 잘되며 3재 (三災)즉 흉년, 질병, 난리가 들어 오지 않고 또 석정의 물을 마시면 오래 산다고 하였으며 특히 청학동에 살면 인재가 많이 날 것이라고 하였다."   

  지리산에 청학동이라고 불리는 곳은 오늘날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어 사는 청학동 말고도  고운 최치원이 학을 타고 놀았다는 불일폭포 부근, 세석고원, 청학이골(악양면 등촌리 위쪽), 상덕평 마을(선비샘 아래) 같은 여러 곳이다. 그렇다면 지리산 곳곳이 청학동인 셈인데  사람의 접근이 쉽지 않은 지리산 심심산골이 민초들의 이상향이 된 것을 보면 관리들의 가혹한 압제와 수탈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현실도피의 이상향으로 여겨졌다고 볼 수 있다. 가정맹어호虎란 말이 있지 않은가? 천국과 서방정토 등 내세가 아닌 현세에서 탈출구를 찾은 점이 종교와 차이가 있을 뿐이다.        

  고려시대 때 이인로가 청학동을 찾아 은거할 뜻을 품었으나 찾지 못하고 지은 시 한편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두류산 아득하다 저문 구름 낮게 깔려
  골짜기와 바위들이 회계산인양 곱구나.
  지팡이 짚고서 청학동 찾자 하나
  숲 저편선 쓸쓸히 잔나비 울음만 들려오네.
  누대는 아득해라 삼산은 멀고 먼데
  이끼 아래 새겨진 네 글자 희미하다.
  묻노라 신선의 땅 그 어디메뇨
  진 꽃잎 물에 떠서 근심만 겹게 하네 
  

  결론을 말하자면 세석평전이 청학동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  

  촛대봉 아래 너덜겅
  이재구는 청학연못 속으로 들어가 거대한 돌문을 열면 전설의 청학동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며, 이 너럭바위 위에 새겨진 복잡한 문양들에 그 비밀의 문을 여는 수수께끼가 숨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고 술주정 비슷한 소리를 한다. 
  너덜겅에서 서쪽으로 쭉 150미터 정도 가니 촛대봉샘이 있고 그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촛대봉 샘물이 지리산 샘 중에서 가장 물맛이 좋다고 한다. 점심을 먹고 자리를 일어서니 구절초 쑥부쟁이 산오이풀 무리들이 기다렸다는 듯 반긴다.

 

 

 

   세석평전細石平田의 우리말은 잔돌평전이다. 지리산 고원 촛대봉과 연신봉 사이 넓고 아늑한 곳이 있어 옛부터 이 곳에서 사람들이 농사도 짓고 살았던 모양이다.  전에는 가을 국화가 피는 계절에는 장관이었는데 지금은 잡목들이 점점 침범하여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고원지대의 꽃과 풀들은 거센 바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키를 낮춘다. 환경에 맞추어 자신을 적응시키는 것이다.   

   이재구가 안도현의 '무식한 놈'이란 시를 읊는다.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絶交다!" 
   

 

 

 

 

 촛대봉  

 세석산장

 

 

 

  저 녀석이 나를 보고 있다. 휘감는 바람소리와 맑은 이슬만이 오롯한 산중에 드문드문 지나는 나그네의 발자욱 소리에 투구 쓴 귀를 세우고 무료함을 잊듯 입을 헤 벌려 나를 보고있다.           

 연하봉. 연하봉은 천왕봉에서 장터목 대피소를 지나 다음 봉우리다. 연하선경은 지리10경 중 하나로 꼽힐만큼 뛰어나다고 하지만 멋진 안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연하봉에서 거림으로 내려서는 일출봉 능선. 사진 중앙의 하얀 점같은 사람은 이재구가 연하통천문으로 혼자 먼저 뛰어올라 가는 모습이다. 

 사진 11시 방향 바위 구멍이 연하통천문이다. 하늘로 통하는 문! 인간의 천상에 대한 염원이 담긴 의미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사진출처 : 지리99  

 

 일출봉. 장터목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천왕봉으로 가려다가 늦잠 잔 사람들이 이리로 몰려든다고 한다.

 제석봉과 천왕봉. 천왕봉에서 흐르는 통신골이 선명하다. 지난 3월 얼어붙은 저 통신골의 빙폭을 타고올라 천왕봉으로 갔던 기억이 새롭다. 지리 주능선을 중심 축으로 하여  통신골의 반대편 골짜기는 칠선계곡이다. 거림골과 도장골의 반대편은 한신계곡이다.     

 

  일출봉에서 와룡폭포 방향으로 가기 위해 능선으로 내려선다.   

  과거 서울지역본부장과 남동발전 전무를 지내셨던 분이 작년에 하동에 오셔서 악양의 최참판댁을 관람하고 차를 마시며 지하철 액자에 걸려있는 것을 보고 적었다며 안쪽 호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읽어 준 시가 있었는데 정호승의 '꽃잎 인연'이라 했다. 현직에 계실 때는 무심했던 것이 이제는 눈에 들어온다고 하셨다.  

   몸끝을 스치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마음을 흔들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저녁 하늘과 만나고 간 기러기 수 만큼이었을까?
   앞강에 흔들리던 보름달 수만큼이었을까?
   가지 끝에 모여와 주는 오늘...
   저 수천 개 꽃잎도 때가 되면...
   비오고 바람 불어 속절없이 흩어지리.
   살아 있는 동안은 바람 불어 언제나 쓸쓸하고..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고 헤어지는 일들도
   빗발과 꽃나무들 만나고 헤어지는 일과 같으리..,
 

   비바람 불면 사람은 떠나지만 꽃은 자리를 지킨다. 쑥부쟁이 구절초 만나고 돌아오는 세석평전은 반가움과 아쉬움이 교차한다. 그래서 꽃잎 하나 보러 먼 길 함께 갈 수 있는 사람이 고마운지 모른다. 지하철역에서 수첩을 꺼내 시를 옮겨 적으며 누군가에게 읊어주는 분도 그렇고...  

  능선에서 와룡폭포로 내려서는데 묵어 길이 거의 없다. 덤불을 헤치며 내려오는데도 용케 와룡폭포가 나온다. 지리산 오기 전날에는 지리산 공부도 한번 더 하고 술을 자제하여 몸을 정갈히 한다는 이재구  2006년에 와 봤다는데도 길찾는 능력은 가히 산신령급이다. 어둑어둑한 산길을 걸어 내려오다 알탕 한번 더 하고  부산으로...

'지리산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리산 왕시루봉  (0) 2011.02.18
지리산 중봉  (0) 2011.02.18
지리산 와운골(2010.8.14)  (0) 2011.02.18
[스크랩] 지리산 덕평봉  (0) 2011.01.26
지리산 덕평봉(1532m)  (0) 2011.01.1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