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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모음

지리산 왕시루봉

by 하얀 사랑 2011. 2. 18.

지리산 왕시루봉과 왕의 강
[염기훈 2010/11/11 08:32 / 조회수:728 / 추천:11]

 

 산행일자 : 2010.11.6 (토) 
 산행코스 : 지리산 노고단~ 문수대~질매재~문바우등~왕시루봉~선교사별장~구만마을
 산행동료 : 이재구 송건주 한영택 김경환 염기훈 
 날      씨 : 맑음  (노고단 기준, 최저 -5℃ 최고 12℃,  해뜨는 시각 06:56  일몰 17:31)
 산행시간 : 07:30~18:00 (10:30분)

  계절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가고 있다. 작년 2009.11.8 노고단에서 왕시루봉코스로 다녀온 이후 겨울 그리고 봄 여름이 가고 다시 가을이 오메 10번째 지리산행을 다시 이 코스로 잡았다. 지난 해  짙은 안개와 추적거리는 가을비 탓에 온 종일 걸었지만 볼 수 없었던 문수대 앞 너덜의 화사한 단풍 숲길과 장쾌한 노고단 남부능선, 왕시루봉에서 왕의 강이라 부르는 섬진강의 우아한 강줄기를 즐기고 노고단 능선을 내려도는 갈색 바람을 맞아 피빛 적신 피아골을 산 위에서 내려다 보는 안복을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산 아래에서 새벽녘 안개 속을 뚫고 달려 성삼재로 오르는 차에서 산을 보니 계절이 지나도 한참 지나 능선의 단풍은 끝났을 것이란 예감대로 숲은 이미 숨을 멈추어 잎을 내릴 채비를 하고 있었다. 철 지난 산행에 아쉬움을 가지며 성삼재에서 씩씩 거리며 올라 노고단 아래 전망대에 서니 솜털같은 하얀 운해가 햇살을 받으며 환하게 내려앉아 있다. 하늘조차 푸르고 맑다. 뜻밖으로 노고단 구름바다의 환타지를 감상하는 안복을 여기서 누릴 줄이야. 이원규시인이 그러지 않았던가?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고~  아! 원추리 꽃무리 진 가을 노고단에는 솜털 구름바다의 유혹이 기다린다.     

  노고단에서 오미리 용두목까지 이어지는 형제봉 월령봉 능선   

  노고단 

 

  문수대 문수암
  문수대 문수암은 노고단 정상 바로 남쪽 큰 바위절벽을 의지하여 양지바른 곳에 다소곳이 자리잡고 있다. 조그만 텃밭에는 무우를 심어 제법 자라고 있고  암자의 주인장은 출타 중인지 인적이 없어 나그네만 잠시 들렀다 나왔다. 지리산에는 비슷한 지형의 이런 암자나 암자터로 짐작되는 곳이 더러 있는데 대게 바위절벽이 북풍한설을 막아주고 바위틈에서 사철 물이 흘러 식수가 끊어질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는 대체로 홀로 수행을 하는 스님이 주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말로써 말할 수 없고 형용으로써 형상할 수 없는 경계를 빌려 禪이라 하메 그 언어도단의 묘리를 얻기 위한 것이리라.  

  해서리 나는 이런 곳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의 용맹정진을 최고로 치는데, 재구 왈 "예로부터 작은 은자는 산 속에 숨고 큰 은자는 저자에 숨는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수행자나 수행에 관해 쓴 글이야 여기저기 많이 있고,  탁영 김일손이나 우암 정시한의 유람기에도 산 속의 스님들 중 보통사람이 아닌 스님을 보았다는 글도 있기는 하지만, 연암 박지원의 글 만큼 수행자의 모습과 空사상을 잘 묘사한 것도 없지않나 싶다. 연암은 금강산 마하연으로 가서 치준대사와 동자의 대화를 자세히 듣고 관찰하여 다음의 관재기觀齋記를 남겼는데 연암집에 전한다.   

   을유년(1765, 영조 41) 가을에 나는 팔담八潭에서부터 거슬러 가서 마하연摩訶衍으로 들어가서 치준대사緇俊大師를 방문하였다. 대사는 손가락을 깍지 껴서 인상印相을 만들고는 눈은 코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동자童子가 옆에서 화로를 뒤적이며 향에 불을 붙이는데, 연기가 동글동글한 것이 마치 헝클어진 머리털을 비끄러 매어 놓은 것 같고, 자욱한 것은 마치 지초芝草가 무성하게 돋아 나는 듯도 하여, 그대로 곧게 오르다가는 바람도 없는데 절로 물결쳐서 너울너울 춤추듯 흔들려 마치 가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동자가 홀연히 묘오妙悟를 발하여 웃으며 말하였다.
 
 “공덕功德이 이미 원만하다가 지나는 바람에도 움직여 도는구나. 내가 부처를 이룸도 한낱 무지개를 일으킴이로다. 
  
사가 눈을 뜨며 말하였다.
 
 “얘야! 너는 그 향香을 맡은 게로구나. 나는 그 재를 볼 뿐이니라. 너는 그 연기를 기뻐하나, 나는 그 공空을 바라보나니. 움직임과 고요함이 이미 적막할진대 공덕은 어디에다 베풀어야 할꼬?
   동자가 말하였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대사가 말하였다.
   “너는 시험 삼아 그 재의 냄새를 맡아 보아라. 다시 무슨 냄새가 나더냐? 너는 그 텅 빈 것을 보아라. 또 무엇이 있더냐?”
   동자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옛날에 스승님께서 제 정수리를 문지르시며 제게 다섯가지 계율을 내리시고 제게 법명法名을 주셨습니다. 이제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이름은 내가 아니요. 나는 공空이라 하십니다. 공空은 형체가 없는 것이니 이름은 장차 어데다 쓴답니까? 청컨대 그 이름을 돌려드리렵니다.
   대사가 말하였다.
   “너는 순순히 받아서 고이 보내도록 해라. 내가 예순 해 동안 세상을 살펴보았으되, 사물은 한 자리에 머무는 법 없이 도도히 모두 가버리는 것이더구나. 해와 달도 흘러가 잠시도 쉬지 않으니, 내일의 해는 오늘이 아닌 것이다. 그럴진대 맞이한다는 것은 거스러는 것이요, 끌어당기는 것은 애만 쓰는 것이니라. 보내는 것을 순리대로 하면, 너는 마음에 머무는 것이 없게 되고, 기운이 막히는 것도 없게 되겠지. 명命에 따라 순응하여 명命으로써 아我를 보고, 이理로써 떠나보내 이理로써 물物을 보면, 흐르는 물이 손가락에 있고 흰구름이 피어날 것이니라."
 
  내가 이때 턱을 받치고 곁에 앉아 이를 듣고 있었는데 참으로 아마득 하였다. 

   백오伯五 서상수徐常修가 그의 집을 관재觀齋라 이름짓고서 내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대저 백오가 어찌 치준緇俊 스님의 설법을 들었단 말인가? 드디어 그 말을 써서 기記로 삼는다. [정민교수 역 ]

    이 글은 고전번역원 번역본 보다 한양대 정민교수 역이 더 깔끔하여 정민 교수 역을 옮겼다.  

  피아골

 

 

 

  노고단 산길에서도 섬진강이 비친다

  천왕봉과 제석봉, 촛대봉 영신봉  

 왕시루봉
 어떤 지도에는 왕시리봉으로 표기되어 있기도 한데 재구 왈; 시루봉이란 이름이 떡시루를 닮아서 시루봉이 아니고 [높음, 으뜸]을 나타내는 우리 고대어의 [살]에서 유래한다고, 초기 삼국시대 관직에 백제의 달솔, 신라의 수마로, 고구려의 욕살 등에서 나타나며 정수리란 의미도 [살]로 삼아 발달한 단어라고...살 → 술 → 술이 → 수리 → 시리 →시루 등으로 변천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루봉은 높은 산, 왕시루봉은 시루봉 중에서 대빵(?)이란 뜻이 되겠다.   

 

  종석대(좌)와 노고단  

  문바우등. 피아골(우)과 문수골(좌) 사이의 이 능선에서는 전망이 가장 좋은 곳이다. 바위에서 내려서는 곳이 門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노고단과 반야봉이 한 눈에 들어온다.  

  느진목재의 야생돌배 
  올 여름은 날이 덥고 비도 많이 와서 들판에는 풍년이 들었다. 원래 산 아래가 풍년이 들면 산 위의 도토리 등 구황식물은 안심하고 흉년이 든다고 한다. 반면 산 아래에 흉년이 들면 산 위 나무들이 내려다보고 있다가 열매를 많이 맺어 어느 정도 균형을 맞혀준다고 하는데, 재구는 요즘 제 배만 불리기 급급한 소위 장관이나 총리하겠다는 이들의 행태가 산 위 도토리나무보다 못하다고 일갈한다.

  올 해 산 위가 흉작이다 보니 멧돼지 가족이 산 아래로 먹거리를 찾아 거리를 활보하다 총 맞는 일이 부쩍 늘어 났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왕시루봉. 산행 중간에 양말을 갈아 신으면 발이 편하다고 한다. 

  왕시루봉 아래 전망대에서 본 섬진강이다. 여기서 찍는 섬진강을 사진작가들은 '왕의 강'이라고 하는데 일출시간이나 일몰시의 좋은 작품들을 더러 볼 수 있다. 좋은 사진은 곧 기다림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사진작가들은 날씨와 빛의 조화를 찾아 자리를 잡고 카메라를 세워 일출이나 일몰시간의 한 순간을 위해 무작정 기다린다. 비가 쏟아지는 날 저녁 무거운 카메라와 야영장비를 지고 한 컷의 사진을 얻기 위해 큰 산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사진작가다. 하여 우리같이 휙 지나가는 사람들이 괜찮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확율은 거의 전무하다고 보아야 한다.  

                              왕의 강 : 언어의 향기님 블로그에서 [펌]

   고은 시인이 오래 전 여기 서서 저문 섬진강을 보고 詩를 썼다.  나는 고은 시인의 詩를 보고 여기 왕시루봉에 꼭 와 보고 싶었는데 작년에 그 꿈을 이루었지만 우중 산행 탓에 안개 속을 헤메다 허탕을 치고  올해 다시 오게 되었다.

    저문 강물을 보라. 저문 강물을 보라
    내가 부르면 가까운 산들은 내려와서
    더 가까운 산으로
    강물 위로 떠오르지만
    또한 저 노고단(老姑壇) 마루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강물은 저물수록 저 혼자 흐를 따름이다.

    저문 강물을 보라.
    나는 여기 서서
    산이 강물과 함께 저무는 것과
    그 보다는 강물이 저 혼자서
    화엄사(華嚴寺) 각황전(覺皇殿) 한 채 싣고 흐르는 것을 본다.

    저문 강물을 보라.
    강물 위에 절을 지어서
    그 곳에 죽은 것들도 돌아와
    함께 저무는 강물을 보라

    강물은 흐르면서 깊어진다.
    나는 여기 서서
    강물이 산을 버리고
    또한 강물을 쉬지 않고 볼 따름이다.

    이제 산 것과 죽은 것이 같아서
    강물은 구례(求禮) 곡성(谷城) 여자들의 소리를 낸다.
    그리하여 강 기슭의 어둠을 깨우거나
    제자리로 돌아가서
    멀리 있는 노고단(老姑壇) 마루도 깨운다.
    깨어있는 것은
    이렇게 저무는구나.
    보라. 만겁(萬劫) 번뇌(煩惱) 있거든 저 강물을 보라

    그러나 섬진강은 왕의 강이 아닐지라도 섬진강이다. 저문 포구에서 강은 산을 품고 산은 강에 안겨 떠내려 오는 것을 보았기에....  

   2009 가을 저녁 하동 상저구 포구에서 

   왕시루봉의 선교사 별장

 

   왕시루봉 아래 선교사 별장. 왕시루봉 아래에는 12동의 건물이 폐가처럼 남아 있다.   

   질매재를 지나 산행 중 남여 외국인 3명이 노고단 방향으로 올라오는 것을 앞서 가던 이재구가 유창한 우리말로 대화하고 있었다. 선교사별장에서 올라와 피아골로 내려간다고 하며 어릴 때도 이 길을 다녔다고 말한다. 이 길은 산꾼들도 잘 오지 않는데 외국인이 쉽게 올라 오는 것이 왕시루봉 아래 선교사 별장과 관련이 있으리라 짐작이 되었다. 여기 내려오니 관리인이 한 명 있는데 그 외국인은 인요한 목사의 형이라고 한다. 어젯밤 여기서 자고 오늘 산으로 갔다고.. 

   왕시루봉 아래 경사가 완만하고 시야가 좋은 곳에 잣나무 숲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 여기 선교사별장은 1961년 지어졌는데 그 이전 노고단의 선교사 별장이 1959년 태풍 사라호에 의거 파손되자 이 곳에  옮겨 지은 것이다. 기독교계에서는 노고단 별장과 이곳이 성경번역 작업 등을 한 곳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이유로 문화재 지정을 요구하고 있으나, 이 땅은 일제 때 동경제대 연습림에서 해방 후 서울대 연습림으로 바뀌었는데 지금은 국립공원지역이며 이 건물이 별장으로 사용된 것들이기 때문에 문화재로 지정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몇몇 증언에 의하면 일제시대 노고단 선교사 별장에는 풀장 골프장 테니스장 농구장 등이 갖추어져 있었고 비서양인은 출입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풍토병을 이유로 여름철에는 한국인들과 완전 격리된 노고단에 별장을 짓고 생활했는데 구례에서 노고단에 올라갈 때는 품삭을 주고 지게에 타거나 가마에 누워 책을 읽으며 올라갔다고 한다. 노고단 별장은 지금은 거의 철거되고 부서진 건물 잔해가 1동 달랑 남아 있다.  

  <여담 하나>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와 부지 조차계약을 맺고 해방후 권리주장 분쟁으로 소송을 했는데 대한민국 정부도 그 계약을 인정해야 된다는 법원판결이 나왔다나…? 헐..
 

 

 

  선교사 별장의 풀장  

 

 왕시루봉에서 구만마을까지의 하산길은 완만하여 길이 좋다. 하지만 거리는 장난이 아니다.  

 

   석양이 지는 구례. 붉은 호수가 있는 곳이 운조루가 있는 오미리다.  그 뒤 섬진강과 접하는 부분이 용두리인데 노고단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형제봉과 월령봉을 거쳐 용두리까지 뻗쳐 섬진강의 물길을 막아 내기에 운조루가 있는 오미리는 명당이 된다고 한다.  

   오미리의 운조루는 영조 때 유이주()가 낙안군수로 있을 때 건축했다. 대문에 들어서면 쌀 두가마반이 들어가는 목통이 있는데, 쌀을 가득 채워놓고 타인능해他人能解란 글을 써 놓아 굶주리는 이 있으면 누구나 구멍을 풀어 쌀을 가져가도록 했다고 한다. 밥 짓는 연기가 끼니 때마다 보이는 것조차 미안해 굴뚝을 모두 처마 밑에다 만들고 연기가 마당으로 깔리도록 했는데, 사방 백리 이내에 굶주리는 이가 없도록 하라는 경주 최부자댁과 더불어 그 옛날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대표적 가문이다.  

                     ※ 이재구와 함께 하는 풍수공부

   풍수공부를 위해 전국을 답사하던 도선은 구례 오산(鰲山)의 사성암(四聖庵)에서 풍수 개안(開眼)을 하고 건너편 사도리 모래밭(沙)에서 그림(圖)을 그려가며 신안(神眼)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지금도 마을 이름이 沙圖里이다.

  원래 두 물이 합쳐지는 합수머리(두물머리)는 명당으로 치며 지금의 구례읍이 위치해 있다. 그리고 물줄기가 휘어져 돌 때에 감싸주는 안쪽은 순세(順勢)로서 명당이 되고, 바깥쪽은 물의 공격을 받기 때문에 역세(逆勢)로서 흉당이 된다. 당연히 사도리는 흉당이 되며 더구나 과거에는 물이 안쪽까지 파고들었으니 더욱 그렇다. 저 멀리 노고단에서 뻗은 산줄기가 형제봉 월령봉을 거쳐 강가에 멈추었으니 용두목(龍頭)이라는 구릉이다.

 

  강은 사도리 옆 용두목에 부딪쳐 흐름을 한번 바꾼다. 용두목이 막아준 덕분에 뒤쪽으로 넓은 들판이 펼쳐졌으니 그곳이 삼남의 제일 길지(吉地)라는 五美里이다. 거기에 운조루(雲鳥樓)가 있다. 逆에서 順으로 바뀐 것이다. 흉당과 명당은 이웃하고 있는 것이 세상이치인가?

 

  지금 사도리(상사?하사마을)는 70~80년대에 강변에 제방을 쌓아 넓은 들이 확보되었고 전국의 최장수 마을 중 하나로 살기 좋은 곳으로 소문난 곳이다. 여기에 둑을 쌓으면 명당이 될 것이라는 도선의 예언과 고민이 실현된 셈인가?

 

  사람이 살기 힘든 환경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한국적 풍수이자 도선 풍수의 특징이며, 그것을 비보(裨補)풍수라 한다.

 

  蛇足 : 우리는 산행중에 점심 먹을 장소 하나 잡는 데에도 주변 지세를 살펴보는데 (예를 들면 겨울에는 바람을 막아주고 양지바른 곳) 하물며 대대로 살아야 할 집터를 잡는 것이라면…? 이처럼 풍수의 출발은 사람 사는 터를 구하는 것이었지 묘자리 잡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처럼 풍수가 일상화된 세상에서는 건물 하나를 짓는 데에도 풍수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선인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조상들의 문화유산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풍수시각도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풍수 이론이 맞느냐 틀리느냐의 문제, 풍수 발복(發福)을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九~

 

  가을은 독서의 계절, 꼭 책을 읽는 것만이 어찌 독서라 하겠는가?

  나뭇잎 지는 숲속길을 걷는 것도 천지자연이라는 큰 책을 읽는 일이 아니겠는가?

  가을이 깊어가는 지리산 40리 길을 걸었으니 실컷 배부르게 책을 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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