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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일자 : 2010. 12. 18 (토) 아는 것 만큼만 보인다. 화개골, 칠불사 운상선원, 서산대사 휴정과 내은적암터 지리산은 넓고 깊고 길다. 능선의 골짜기마다 전설이 주저리 매달려 역사로 기록되고 입으로 구전되고 바위에 새겨져 있다. 깊이와 넓이, 역사의 긴 두께 때문에 한두 해 지리산을 다닌다 해서 쉽게 그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 : "다음 코스는 어디고?" 구 : "어디라 하면 아나?" 나 : "모린다" 지리산 코스는 이재구가 잡는다. 제 안방 문갑 속 바늘이 어디 있는지 알 듯 지리산을 속살까지 꿰고 있다. 산에 가기 전날 지도를 펴놓고 계곡을 몇 번 건너고, 건너다 어디서 언 넘이 미끌어질지도 상상한다(꼭 미끌어져 빠지는 넘 하나 있다). 이미 몇 번씩 와 본 코스일지라도 소 되새김질하듯 다시 공부한다. 따라가는 넘들은 다리와 눈, 귀만 챙기면 되니 지리산행은 거저 먹기다(물론 거저 먹기조차 못하는 넘들도 수두록 하다). 그러니 함께 가면서도 아는 것이 없고, 아는 것이 없으니 눈은 있어되 보이는 것이 없고 보이는 것이 없으니 산길만 가는 장님이다. 이재구는 지리산의 속살과 긴 역사의 두께를 술술 풀어 눈뜬 장님들에게 귀로 들려주고 손에 쥐어주고 입에 넣어준다. 내가 쓰는 산행기는 그중의 일부분이다.
하동군 화개면은 지리산에서도 신라 때 대렴공이 중국에서 차씨를 가져와 쌍계사 앞에 처음으로 차를 재배한 차의 시배지로 알려져 있는데 수령 천년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차나무가 화개면 정금리에 있고, 화개천을 따라 늘어선 푸른 차밭이 비탈진 지리산과 어우러져 사철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초의선사도 [동다송]에서 "지리산 화개동에는 차나무가 사오십리나 잇달아 자라고 있는데, 우리나라 차밭의 넓이로는 이보다 지나친 것을 헤아릴 수 없다"고 했다. 봄이면 섬진강변과 화개천을 따라 쌍계사까지 피는 벚꽃길은 새벽녁에 가 보면 일품이다. 섬진강에서 화개천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쌍계사를 지나고 신흥삼거리에서 왼편으로 가면 칠불사로, 오른편으로 가면 의신마을로 가는데, 하동지점 근무시 하동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녀봤지만 특이하게도 이 골짜기에는 옛사람들의 자취가 많이 남아있다. 쌍계사에 남아 있는 고운 최치운의 진감국사탑비나 쌍계석문, 환학대와 불일폭포, 여러 선비들의 유람기에 나오는 신흥사, 왕성초등학교 앞 세이암과 탁영대 刻字, 가락국 김수로왕의 7왕자가 출가했다는 칠불사와 아자방 등 그러나 이번 산행에서 이 골짜기에 내은적암터가 있고 서산대사 휴정이 이 골짜기에서 입산하고 득오 했다는 것은 처음 알았고, 칠불사 운상선원과 고승들의 부도, 신흥사 홍류교와 능파각 이바구 등을 새로 접했다. 더구나 그것들이 자주 지나다니는 길목에 있었음에도...그래서 아는 것만큼만 보인다는 말을 절감한다.
07:45 산행초입의 목통마을
08:48 목통마을에서 목통골 계곡을 따라 오르니 군데군데 돌축대 등으로 이루어진 집터가 보이는데 연동마을이 있었다고 연동골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장꾼들이 쉬어가던 주막도 있었으나 빨치산 전투 때 초토화 작전의 일환으로 마을을 소개시켰다고 한다. 연동마을터 인근에는 겨울이 한창인 산 속에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어 흔들어 몇 개 떨어뜨려 먹어보니 나무에 매달려 언 홍시가 맛이 좋다. 여기서 멀지 않은 악양의 대봉감 홍시가 유명한데 산 속 자연산 홍시맛도 그에 못지않다. 스물아홉의 나이에 무농약, 무비료 사과 재배에 도전한 후 산 속에서 도토리가 탐스럽게 영그는 것을 보고 영감을 얻어 포기하지 않고 사과나무를 돌본 끝에 10년 만에 성공, 썩지 않는 기적의 사과를 얻는다는 내용이 있다. 나 도 주말 텃밭 푸성귀나 배추농사를 지으며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하지 않고, 벌레 한 번 잡지 않고도 수확을 잘 하고 있다만서도, 대부분의 농작물이나 과일나무는 사람에 길들여진 탓에 화학비료와 농약 등의 도움없이는 스스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병충해를 이기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그런 의미에서 연동마을터의 언 홍시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감나무를 보니 자연은 스스로 생존하고 환경에 적응하며 후손을 이어가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09:22 깊은 겨울이지만 지리산은 계곡는 우렁찬 소리가 날 정도로 물이 풍부하다. 너덜겅 아래로 물소리가 흐르고 벌써 봄이 온 듯 날이 따스하다. 11:25 화개재 (1,320m)삼도봉과 토끼봉 사이 화개 목통골과 뱀사골이 만나는 곳이다. 지리산 주능선에 위치한 고개 중에서 해발이 가장 낮은 곳이다. 옛날 섬진강 나루에서 어물을 지고 화개골을 거쳐 화개재를 오른 장사치들과 남원의 산골에서 나는 특산물을 지고 뱀사골로 올라온 장꾼들이 만나 물물교환도 하던 장터다.
서산대사가 칠불사에서 친구를 만나러 지리산을 넘어 남원으로 가다가 낮닭 우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우쳐서 되돌아갔다고 하는데, 아마 이 화개재를 넘어가지 않았을까? 봉성(鳳城)을 지나다 낮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머리는 희었으되 마음은 늙지 않았다고
화개재에서 토끼봉 가는 지리산 주 능선으로 올라서니 반야봉 아래 묘향대가 적막하게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12:00 토끼봉 정상에 상고대가 피었다. 멀리 노고단이 보인다. 토끼봉은 그 모양이 토끼를 닮았다 하여 불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반야봉의 동쪽 즉, 12간지로 묘卯방향이라 하여 묘봉卯峰이라 불렀다고 한다. 卯時는 5~7시까지로 이른 아침 동녁에 해뜨기 전, 아직 달도 떠 있고 옥토끼가 방아를 찧는 것이 잘 보이는 시간이라고
지리산 주능선의 웅장한 모습. 중봉, 천왕봉, 영신봉, 일출봉 능선과 촛대봉도 조그맣게 보인다.
토끼봉에서 칠불사 방향으로 하산
주능선의 형제봉. 능선 양 쪽의 바위가 형제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원래는 父子바위였다고 한다.
14:33 칠불사 스님들이 만든 것으로 짐작되는 샘물. 흙이 고이고 낙엽이 쌓여 이재구가 청소를 하고 있다. 이재구는 그 공덕으로 내세에 지리산 샘물지기라도 꿰찰 수 있을 것 같다. 15:08 칠불사 운상선원雲上禪院 칠불사. 아자방亞字房으로 유명한 곳이다. 삼국유사 '금관성의 파사석탑'편에 보면 "수로왕의 왕비 황옥黃玉이 동한 건무 24년 갑신년(AD48년) 서역 아유타국에서 파사석탑을 배에 싣고 왔다"고 하여 불교의 남방전래설를 기록하고 있지만 그 당시 "해동에는 아직 절을 지어 불법을 받드는 사례가 없었고, [가락국본기]에도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없다"고 하여 칠불사의 저 전설이 사실인지 고증하기는 어렵다. 파사석탑은 현재 김해의 허수로왕비릉에 안치되어 있고, 가락국을 통한 남방불교전래에 대한 전설은 김해지역의 사찰마다 흔하지만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雲上禪院 부휴대사浮休大師 부도 부휴자 칠불사 운상선원에서는 중양절[9월9일]에 이 곳에서 부휴선사에게 차를 올린다고 한다. 신라 때 충담사忠談師가 경주 남산 삼화령 돌미륵부처님에게 매년 [3월3일과 9월9일] 차를 끓여 바쳤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는 바 [忠談師每歲重三重九, 烹茶獻供者, 是此尊也], 신라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인 듯 하다. 한편 화개 주민들 사이에는 이런 차민요가 노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한다고 하는데 선동골 밝기 전에 金堂 복수(福水) 길어와서
운상선원 인근의 기도터.
인허당印虛堂 부도
칠불사 사적기 기단부 허왕후는 성불한 일곱 왕자가 속세와는 모든 인연을 끊고 세상에 나오지 않자 어느 날 칠불암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불법(佛法)이 엄하여 허왕후조차 선원(禪院)에 들어갈 수 없었다. 여러 날을 선원(禪院) 밖에서 안타깝게 기다리던 허왕후는 참다 못해 성불한 아들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러보았다. 얼마 후 아들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우리 칠형제는 이미 출가 성불하여 속인을 대할 수 없으니 돌아가시라”는 음성만 들렸다. 허왕후는 아들의 음성만 들어도 반가웠으나,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다고 간청했다. 그러자 “선원(禪院) 앞 연못가로 오시라”는 아들들이 말에 허왕후는 연못으로 갔다. 허왕후가 두리번거리고 찾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실망한 허왕후는 발길을 돌리려다 연못 속을 들어다보니 일곱 왕자가 합장을 하고 있었다. 허왕후는 효심을 나타낸 아들의 모습을 오랫 동안 지켜보고 싶었으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한번 사라진 그들의 모습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16:26 三神洞 각자刻字. 孤雲의 필적이라 전한다. 화개동에서 칠불사와 의신으로 갈라지는 신흥삼거리에 있는데 옛날 인근에 있던 신응神凝, 의신義神, 영신靈神의 세 암자의 뜻을 취한 것이라 한다.
삼신동 각자가 있는 신흥삼거리 내에는 홍류교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옛날 겨울에 얼음이 얼고 여름에 비가 오면 양쪽 사람이 서로 왕래하지 못하므로 가정嘉靖 신유년辛酉年 여름 덕사德士 옥륜玉崙이 도우道友 조연祖演에게 부탁하여 시냇가에 누워있는 돌소石牛와 돌염소石羊를 채찍질하여 기둥을 만들고 한 층의 긴 다리를 놓아고 다리 위에는 다섯간의 높은 누각을 짓고 붉은 빛으로 곱게 단청을 한 뒤에 그 다리 이름을 홍류紅流라 하고 그 누각 이름을 능파凌波라 하였다." 청허당집의 두류산 신흥사 능파각기에 나오는 이바구다. 바위의 구멍은 홍류교 교각을 세웠던 자국이다.
16:50 내은적암터
신흥삼거리 왕성초등학교 뒷편 가파른 언덕 위에 폐사지로 남은 내은적암터 내은적암터를 찾아서 "이 암자는 신라 말엽에 거설간이 초창하였고....중략.... 빈도가 지금 경신년(庚申年 1580년) 여름에 지팡이와 짚신으로 여기와서 머물렀더니, 기와와 서까래가 모두 허물어져 사는 스님이 근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수리를 하고자 하여 손수 이 글을 지어 인연을 구하는 것입니다. 여러 시주님들은 각기 재물이나 곡식을 내어 훌륭한 복전福田을 이룩하시기 삼가 바랍니다..... 중략.... 뜻을 같이하는 군자들은 이 글에 이름을 적으십시오." 보시를 하면 복을 많이 받는다는 뜻의 모연문을 서산대사 휴정이 더러 지었다는 사실에 슬쩍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우쨋던 쓰러져가는 절집의 중건을 위해 애쓴 스님 덕분에 내은적암의 암자가 모습을 갖추었나보다. 또 상량문도 지었다. "암자가 이루어졌으매 좋은 날을 받아 상량한다. 소나무 뼈를 쪼개어 들보를 만들고 푸른 구름을 베어 지붕을 만들고 맑은 바람을 끌어 벽을 만들고 밝은 달을 걸어 등燈을 삼았다. 천지가 열리기 전에 이 암자는 이미 이루어졌고 천지가 이미 무너졌어도 이 암자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서산대사 휴정 9세에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에 아버지가 죽게 되자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을 따라 서울로 옮겨 성균관에서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혔다. 과거를 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친구들과 같이 지리산의 화엄동(華嚴洞) 칠불동(七佛洞) 등을 구경하면서 여러 사찰에 기거하던 중, 영관대사(靈觀大師)의 설법을 듣고 불법(佛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깊은 교리를 탐구하던 중에 깨달은 바 있어 스스로 시를 짓고 삭발한 다음 출가하였다. 그 뒤 영관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운수(雲水) 행각을 하며 공부에만 전념하다가 1549년(명종 4) 승과(僧科)에 급제하였고,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 하고 이 자리에서 물러나 금강산, 두류산,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 등을 두루 행각하며 스스로 보임(保任)하였고, 후학을 만나면 친절히 지도하였다. 1589년(선조 22)에 《정감록 鄭鑑錄》의 미신에 의하여 정여립(鄭汝立)이 왕위에 오른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역모(逆謀)를 꾀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역모에 가담한 요승 무업(無業)이 휴정과 유정(惟政)이 자신과 함께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주장하여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의 공초(供招)가 명백하였으므로, 선조는 그를 무죄석방하면서 손수 그린 묵죽(墨竹) 한 폭을 하사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를 구할수 있도록 부처에게 기원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통솔하여 전쟁터로 나아가 나라를 구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곧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각 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影幀)을 꺼내어 그 뒷면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는 시를 적어 유정과 처영에게 전하게 하고 가부좌하여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나이 85세, 법랍 67세였다.
내은적암터에서 내려다 본 풍경. 왼편이 의신에서 내려오는 계곡이고 왕성초등학교 자리가 신흥사터이며 그 앞 바위에 세이암과 탁영대 각자刻字가 새겨져 있다. 오른편 다리 신흥삼거리 합수지점 인근이 홍류교 흔적과 三神洞 각자刻字가 있는 곳이다. 서산대사는 신흥사 능파각기凌波閣記에서 "골짜기 가운데 한 마을이 있어서 네댓 집이 사는데 꽃과 대나무가 어지러이 비치고 닭 울음과 개짖는 소리 들린다. 거기 사는 사람들은 의관이 순박하고 모발도 옛스러우며 생계는 다만 밭갈기와 우물 파는 것 뿐이요, 서로 찾고 만나는 사람은 다만 늙은 스님 뿐이다. 골짜기에서 절의 문으로 가려면 남으로 수십 걸음쯤 되며 동,서의 두 시내가 합해 한 골짜기 물이 되었다. 맑은 물에 돌이 부딪쳐 굽이치면서 소리를 내는데 놀란 물결이 한 번 뒤치면 설화雪花가 어지러이 날리니 참으로 기관奇觀이다. 시내의 양쪽 언덕에 수천의 돌소石牛와 돌염소石羊가 누었으니 이 물건은 처음 하늘이 험한 곳을 만들면서 반드시 그 영부靈府를 숨기려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17:08 세이암
탁영대 세이암洗耳嵒 그리고 탁영대濯纓臺 세이암은 신라 때 고운 최치원이 임금으로부터 벼슬길에 나오라는 명을 받고 못들을 것을 들었다며 귀를 씻었다 뜻으로 새긴 곳이며, 탁영濯纓은 갓끈을 씻는다는 의미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는다"는 초나라 굴원이 쓴 어부사漁父辭에 나오는 글로서, 군주로부터 버림받은 굴원이 세상을 비관하고 돌아다니다 우연히 만난 어부로 부터 들은 "세상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벼슬길에 나아가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은둔하여 제 몸 간수나 하라"는 핀잔의 말이니 濯纓臺는 갓끈을 씻어 벼슬길로 나가겠다는 선비정신의 표상表象이다. 그러니 이 곳 화개골 세이암과 탁영대는 지리산 맑은 물에 귀를 씻고, 갓끈을 씻어 몸과 정신을 정갈히 하겠다는 옛사람들의 정신이 후세로 도도히 전해 흐르는 곳이다. 하동문화원에서 펴낸 책에는 탁영대를 조선 성종 때 탁영 김일손이 지리산을 유람할 때 자신의 호를 따서 새긴 것이라 주장하고 있고 글쟁이들도 더러 그렇게 쓰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정작 김일손의 지리산 유람기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을 뿐더러 '탁영대' 각자는 전국에 여러 곳 있어 주장의 신빙성이 떨어진다. ----------------------------------------------------------------------------------------- 主人夢說客 주인은 손에게 제 꿈 이야기를 하고 청허당 휴정의 三夢詞란 詩다. 어차피 사람 사는 일이란 것이 저 마다의 한바탕 꿈 이바구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도 산에 가서 들은 남의 꿈 이바구를 내 꿈 이바구하듯 꿈 속에서 잠꼬대로 설레발을 치고 있는 것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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