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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모음

촛대봉남능 산행기

by 하얀 사랑 2012. 9. 10.

지리산 촛대봉 남릉과 세석평원
[염기훈 2012/09/06 08:25]

○ 일시 : 2012.9.1(토) 04:50 교대앞

○ 코스  : 거림 - 촛대봉 남릉 - 청학연못 - 촛대봉샘 - 촛대봉 - 영신봉 - 음양수샘 - 남부능선 - 한벗

               샘 - 자빠진골 - 거림 

○ 산에 간 넘들 : 이재구, 김경환, 한영택, 송건주, 염기훈   

 

 

   지리산  산행기를 쓴 것이 38회니 나도 대충 동서남북으로 60회 정도 지리산을 다닌 것 같다만  산이 지리산인지라 아직도 항상 초행자의 마음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지리산 산행은 몇십 년간 지리산을 다닌 이대장의 계획에 따라 움직인다. 산행계획은 계절에 따라 여름은 이끼 푸른 계곡과 운해, 가을은 산오이풀, 쑥부쟁이와 구절초와 단풍, 겨울은 눈산행 등이고, 지역별로는  지리산 하동,구례 쪽의 남부, 산청 쪽의 동부, 함양방향의 북부, 남원방향의 서부 등으로 가 본 곳은 코스를 바꾸어가며 짜여진다. 그기에 지리산의 역사와 문화, 설화들과 도반들의 구수한 입담이 곁들여지면 산행은 한껏 재미를 더하게 된다.  

 

   "해마다 이맘때 쯤이면 촛대봉 밑 구절초 쑥부쟁이 산오이풀 등이 바람에 몸을 낮추고 푸르른 가을 하늘 아래  황홀하게 피어나는 곳, 태풍이 오면 꽃들이 온전한 제모습을 지키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태풍을 이겨낸 찬란한 꽃들을 우리가 보아주러 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대장이 9월 산행으로 세석평원의 구절초를 보러 가자며 한 辯이다.      

 

  세석의 구절초는 2010.9.10 그러니까 꼭 2년전에 다녀왔지만 그때는 거림에서 출발하여 도장골로 해서 와룡폭포 ~장군봉~ 세석으로 갔었고, 하산은 연하봉능선을 거쳐 와룡폭포~거림의 원점회귀였는데, 이번에는 거림에서 바로 능선을 타고 오르는 촛대봉남릉 코스다. 하산은 반대방향인 영신봉 남부능선~한벗샘~자빠진골~거림의 원점회귀다.      

 

  07:40 거림에 차를 대고 산행을 시작한다. 거림에서 촛대봉남릉을 기준으로 왼편은 거림골, 오른편은 도장골이고, 촛대남릉으로 오르면 장군봉(시루봉)과 촛대봉으로 바로 오른다.  국공초소를 막 지나 큰 소나무에서 좌측으로 가는 등산로는 세석으로 가는 정규등산로이고, 그 소나무에서 능선을 타면 촛대봉남릉이다. 거림마을은 지금은 등산객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는 업소들이 늘어서 있지만 50년대 초에만 하더라도 메밀밭에 산막이 달랑 한 채 있는 정도였다고 한다.    

 

 

 

 

 

 

 

 

 

 

 

 

 

 

 

 

 

 

 

 10:10  두 시간 반여 급경사 능선을 차고 오르니 멀리 천왕봉이 연꽃송이처럼 피어난다. 

 

 

 

 11:32 장군봉

  거림에서 네시간 정도를 씩씩거리며 올라오니 장군봉이다. 2년 전에 도장골로 왔을 때에는 안개로 시야가 가려 전망이 좋지 않았는데, 오늘은 그 전보다는 나아 보이지만 촛대봉과 영신봉 그리고 아래 거림마을과 건너편 영신봉 남부릉선 등이 안개 속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하며 상봉을 보여주기는 한사코 거부한다.  

 

 11:26 장군봉(시루봉)에 도착하여 보니  올라온 촛대남릉이 아득하다. 그 아래 마을이 거림이다. 능선을 기준으로 좌측이 도장골, 우측이 거림골이다.  

  촛대봉(우)과 영신봉 그 사이가 세석평원이다.

  영신봉에서 삼신봉으로 흐르는 낙낙정맥인 영신봉 남부능선 

   12:23 청학연못 

  장군봉에서 촛대봉으로 조금 올라가다 오른편 언덕 아래 청학굴에 잠시 들러보고 나와 조금 오르다 왼편으로 오솔길로 청학연못을 찾아든다. 2년 전에는 길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알려졌는지 길이 반들하다. 5분쯤 들어가면 45도 쯤 누운 큰 암벽 아래 물이 흘러들어와 못을 이루고 있다. 못에 물고기가 살고 있을까 들여다 보니 올챙이들이 무리지어 놀고 있다. 두 번이나 여기를 찾다 못찾았다며 부부로 보이는 중년의 산객 2쌍이 연못으로 찾아든다.   

 

  청학연못은 옛날 세석평전에 살던 사람들이 인공적으로 만든 연못인데 산 위에 물이 풍부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저여원(沮洳原 : 습한 평원)은 산등성이에 있었고, 평평하고 광활한 땅이 5∼6리나 펼쳐져 있었으며 숲이 무성히 우거지고 샘물이 주위에 흘러 농사를 지으며 살 만하였다"고 하는 유두류록의 세석평원에 대한 기록을 보건대 조선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이 연못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문인 이인로의 《파한집》에  

  “지리산이 백두산에서부터 시작하여 꽃같은 봉우리와 꽃받침 같은 골짜기가 면면하게 잇따라서 대방군(帶方郡)에 와서는 수천 리를 서리어 맺히었는데, 산을 둘러 있는 것이 10여 주이다. 한 달이 넘게 걸려야 그 주위를 다 구경할 수 있다. 늙은이들이 서로 전해 오는 말에, ‘그 안에 청학동이 있는데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겨우 통행할 만하여, 엎드려서 몇리를 지나면 넓게 트인 지경에 들어가게 된다. 사방이 모두 옥토여서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푸른 학이 그 안에 서식하는 까닭에 이렇게 청학동이라 부른다. 옛날 속세를 피한 사람이 살던 곳으로 무너진 담이 아직도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다.’ 한다.

   지난날 나는 최상국(崔相國) 아무와 함께 이 속세를 떠나 길이 숨을 뜻이 있어서 청학동을 찾기로 서로 약속하였다. 장차 대롱[竹籠]에 송아지 두세 마리씩을 담아가지고 들어만 가면, 속세와 서로 상관하지 않아도 되리라. 화엄사에서 출발하여 화개현에 이르러 신흥사에서 유숙하니, 지나는 곳마다 선경 아닌 데가 없었다. 천 바위가 다투어 빼어났고 만 구렁 물이 다투어 흐른다. 대 울타리 초가 지붕에 복숭아꽃이 가렸다 비쳤다 하니, 자못 인간 세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른바 청학동이란 것은 마침내 찾지 못하였다.

  나는 바위에다가 詩를 적기를, ‘두류산 멀고 저녁 구름 낮으막한데, 만 구렁 천 바위가 회계(會稽)와 같네. 지팡이 끌며 청학동을 찾으려는데 숲을 격해서 원숭이 울음소리만 들린다. 누대는 아득히 삼신산이 멀고, 이끼 끼어 네 글자가 쓰인 것이 희미하네. 신선이 있는 곳 그 어디런가. 떨어지는 꽃, 흐르는 물이 아득하기만 하네.’ 했다.” 하였다.

 

  詩를 적은 바위가 촛대봉 정상 부근에 있었다는데, 오래전 국공직원들이 그 바위가 위험하다며 굴러버렸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가 떠돈다고....

  그런데 이인로의 파한집에도 지리산이 백두산에서 시작되어었다는 글이 있는 것을 보니 우리민족의 백두대간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촛대봉을 오르다 위에서 보는 장군봉(시루봉)

 12:50 촛대봉샘

 청학연못에서 도로 나와 촛대봉으로 오르다 왼편으로 빠지는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면 촛대봉샘이 나온다. 세석평원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사철 넘치고 옆에는 조금 넓은 자리가 있어 점심 먹기에 적당하다. 햇살도 적당하고, 바람이 있고, 물흐르는 소리 졸졸하며 술과 밥이 있으니 이상향이 뭐 별건가?

  촛대봉 샘 옆에 핀 칼잎용담

 

   아뿔사!

   지난 태풍으로 쑥부쟁이 구절초 등이 상처를 많이 입었다. 바위틈이나 풀숲에 숨어 키를 키우지 못한 연약한 꽃들이 큰 바람을 피해가기는 어려웠던지 상하여 온전한 넘들이 많지 않다. 지난 해보다 열흘 일찍 찾아 온 탓인지 몽오리조차 맺지 않은 애들이 오히려 더 많다. 야생에서 살아가는 넘들에게 너무 기대를 하였는지 모르지만, 아쉬움이 큰 탓이지 다음주에 한 번 더 오자는 말이 나오는 것은 화려할 것 없는 가을 세석평전의 쑥부쟁이와 구절초, 산오이풀의 그 수수한 모습이 그리웠기 때문이리라!     

 

  14:28 촛대봉

  영신봉과 세석평원

  세석산장 오른편 위 백무동으로 넘어가는 위치의 바위가 한신바위이고 영신봉 오른편 바위가 운장바위라고 한다. 운장은 삼국지의 관운장을 말함이고 한신은 초한지의 항우와 맞짱뜨던 한신장군 이름인데, 지리산 바위에 왜 그런 이름이 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만 순전히 내 생각으로는 관운장이나 한신이나 무당들이 신으로 모시는 그런 기도터 용도 때문에 붙은 이름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더구나 세석 아래가 백명의 무당들이 활약했다는 백무동 아닌가?  이대장은 이에 덧붙여 "옛비결서를 믿는 사람들이 청학동을 찾아 세석고원에 모여들어 살면서  삼제갈(三諸葛) 팔한신(八韓信)이 난다는 전설을 믿으며, 

그들의 염원을 바위이름에다 붙였다고 볼 수도 있다며, 한신계곡의 지명도 한신바위에서 유래되었다" 고 한다.

 

  조석으로 올려다보며 나를 신비감에 젖게 하던 해발 1천7백 미터대의 그 산마루는 직경 2km가 넘는 완만한 경사의 벌판이었다. 일제시대 이곳에 비행장을 닦으려 했다는 선요원의 말이 있었지만, 붉게 물든 관목 숲이 눈길 아득히 펼쳐진 광활한 고원 풍경은 정말 장관이었다. 이 고원의 늦봄의 철쭉 바다가 명물이라지만, 평지에는 아직도 녹음이 짙은 그 무렵, 온 고원을 뒤덮은 황적색의 단풍 바다는 눈을 의심할 만큼 아름다웠다. 

  고원 한복판을 흐르는 한 줄기 시냇가에 단풍잎에 파묻혀 보일듯 말 듯 토막집 한 채가 있었다. 약재를 캐는 중년부부가 사는 산막이었다. 우리는 그 집에 하룻밤 묵기를 청했다. 

  주인 내외는 사람이 그리웠던지 반갑게 맞아주며 비어있는 토방을 치우고 군불까지 지펴 주었다. 휴대한 쌀을 내주니 산채나물을 곁들인 밥상이 나왔다. 오랜만에 상을 받쳐 찬 있는 밥을 먹고 뜨뜻한 구들에 다리를 펴고 누우니 세상이 부러울 것이 없는 기분이었다. 어둠이 덮쳐오자 고원은 태고로 돌아간 듯 바람소리만 남았다. 낙엽이 지고 눈보라 치는 밤이면 이 산막은 얼마나 적막할까? 그날 밤 호롱불을 가운데 놓고 주인과 나그네는 산과 약초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 고원에서 약초를 캐며 20여 년을 살아왔다는 주인내외의 산 생활 이야기는 신비롭고, 재미있고, 무궁무진했다. ~ 중략~ 

  이튿날 아침 세수를 하러 시냇가에 내려 갔을 때, 돌과 단풍과 가을물이 조화된 청렬(淸洌)한 아름다움은 표현할 말이 도저히 없었다. 고원의 산막에서의 그 하룻밤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을만큼 인상적이었는데  그해 겨울 국군의 대규모 작전이 있은 후 그곳을 지나게 된 선요원이 들러봤더니 산막은 불타 없어지고 주인내외는 시체가 되어 눈속에 묻혀있더라는 얘기였다. 

  이태의 남부군에 나오는 세석평원 산막에 관한 이야기다. 이태는 이 때 거림(도장골)의 환자비트에 숨어있다 몸이 완쾌되어 원대복귀를 위해 도장골로 해가 질 무렵 세석평전에 올랐는데, 그 때 본 세석평원의 아름다움과 산막주인인 부부와의 하룻밤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라이언킹의 위용이 뚜렷한  촛대봉의 사자바위  

   꽃모양이 투구를 닮아 투구꽃이라고 하는데 영화 '각시투구꽃의 비밀'에서 독초로 나오는 그 꽃이다. 주로 깊은 산에 사는 다년생인데 뿌리에 독이 있다고 한다.  

  15:06 영신봉

   영신봉은 백두대간 중에서 지리산에서 낙동강과 남해를 가르는 낙낙정맥의 시작되는 곳이다. 낙낙정맥은 영신봉에서 시작하여 청학동 뒤의 삼신봉으로 이어져 김해의 신어산을 거쳐 낙동강 고암나루까지  580리길 마루금이다. 

   영신봉은 또한 반야봉과 천왕봉의 중간쯤 위치해 있어 날씨가 좋은 날이면 양쪽을 모두 바라볼 수 있어 비박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하는데 정상에는 바위에 둘러쌓여 텐트 하나를 칠만한 적당한 자리가 있다.  이대장이 언제 함 오자고 말하는데, 짊어지고 와야 할 곳이 자꾸 생기니 그것도 예사일이 아니다.

 

  영신봉에서 남부능선을 타면 삼신봉으로 거쳐 청학동으로 가거나 쌍계사로 갈 수 있다. 또한 도중에 우측으로 빠져 의신마을로 내려가거나 조금더 진행해 한벗샘 안부에서 좌측의 자빠진골로 거림으로 내려갈 수 있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영신봉 아래 영신사에서 자고  "일찍 일어나 문을 여니 섬진강 조수가 불어난 것을 보았다. 한참을 쳐다보니, 바로 물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것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과연 화개동천과 섬진강이 보인다. 사진은 화개동천과 섬진강이 만나는 화개장터 

 

  15:18 창불대

  영신봉 아래 창불대는 옛 유람록에 자주 등장하는데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는 "저물녘에 창불대에 올랐다. 우뚝 솟은 바위여서 아래는 끝이 보이지 않고 위로는 초목이 없었다. 다만 철쭉 몇 떨기와 영양의 똥이 있을 뿐이었다. 두원곶,여수곶과 섬진강 끝을 굽어보니 산과 바다가 어우러져 더욱 기묘하였다"고 했고,  김일손의 두류기행록에는 "영신사에 묵었다. 이 절 앞에는 창불대가 있고 뒤에는 좌고대가 있는데, 천 길이나 우뚝 솟아 있어 그 위에 올라가면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라고 했다. 

  과연 창불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니 머리가 아찔하다.   

  음양수  

  창불대에서 남부능선을 타고 20여분 내려가면 기도터와 음양수샘이 나온다.  바위 좌측과 우측의 틈사이에서 맑은 물이 졸졸 흘러나와 산객들의 목을 적셔준다. 인근에 돌절구 등이 있고 기도터가 있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인근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00

  17:20 한벗샘 안부. 남부능선에서 거림골로 내려가는 길목인데 샛길이라 따로 표시는 없다.  

  자빠진골로 하산

  한벗샘 안부 바로 아래 샘이 있는데 자빠진골의 발원지다. 이후 거림까지 계곡(자빠진골)을 따라 하산한다. 남부능선 너머가 의신마을 위의 대성골이고 빗점골과 더불어 남부군 최악의 날로 기록된 대성골전투가 있던 곳이다.  1952년 겨울 대성골 전투시에 군경에게 대패한 빨치산 패잔병들이 남부능선을 넘어 자빠지고 엎어지면서 거림골 도장골로 스며든 루트였기에 이름이 '자빠진골'이라 한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옛날부터 거림과 대성동 주민들이 수곡재를 사이에 두고 넘나든 길이었으니 그전부터 자빠진골이라 불렸을 가능성이 높고, 또 유암폭포 옆에서 일출봉능선으로 이르는 골짜기와 구곡산의 도솔암 왼쪽계곡도 자빠진골이라 부르기도 하니 그 명칭은 특정 골짜기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보통명사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그럼 무슨 뜻일까? 첫째 자빠질 것처럼 골짜기가 곤두서 있다는 뜻. 둘째 자빠져 있다는 것은 누워있다는 것이니 밖에서는 잘 안 보일 정도로 숨어있다는 뜻. 셋째 이 2가지가 합쳐 그런 이름이 되었을 수도...이재구 이야기다.

 

  지리산 고원에 위치한 잔돌평전(세석평원)은 제석봉과 더불어 지리산에서 흔치 않는 평원을 이루어  거센 바람을 받으며 키작은 관목 숲과 꽃무리들을 키우고, 봄 여름 가을 겨울 마다의 아름다움을 가꾼다. 그 평원을 중심으로 촛대봉, 영신봉, 청학연못, 청학굴, 음양수, 호야와 연진, 빨치산 이야기, 유람록 등이 얽혀, 산을 찾는 이들에게 전설을 들려주고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지리산은 그래서 산을 찾다찾다  더 이상 갈 곳 없는 산꾼들이 맨 나중에 모여드는 산이라!  

 

  자빠진골과 거림골 합수점에서 몸을 씻고 나니 6시다.  꽃마중하는 마음이 그리 넉넉하지 못했기에  약간 아쉬운 마음으로 11시간 산행을 마쳤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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