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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모음

지리산 피아골&불무장등 산행기

by 하얀 사랑 2013. 11. 29.

지리산 피아골과 불무장등
[염기훈 2013/11/15 11:06]

 

 

○ 산행일시 : 2013.11.11(월)

○ 직전마을(07:40) - 피아골대피소 - 용수골 - 삼도봉(낫날봉) - 불모장등 - 무착대 - 직전마을 (17:10)

○ 산행인원 : 4명 (이재구 한영택 김택영 염기훈)   

 

 

    50리 피아골은 단풍으로 유명한 곳이다. 골짜기마다 가지가지 단풍이 흐드러지고 자지러져 해마다 시월이면 단풍제가 열리고 온 산이 등산객들로 줄을 잇는다. 지금은 골짜기를 따라 그럴듯한 집들이 늘어섰고 등산객과 관광객들이 무시로 드나들지만 과거에는 지리산 피아골은 계곡이 좁고 험해 사람들이 그 언덕에 기대어 살만한 넉넉한 자리를 사람들에게 내어주지 않았다. 산기슭을 따라 피(기장稷) 외에는 자라는 것이 없어 피밭골이라 했고, 피아골이라는 이름은 이 피밭골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지금에야 아름다운 우리 땅으로 사진작가들이 즐겨찾는 다랭이논들이 피아골에 많은 것은 쫓기고 내몰려 들어온 민초들이 산을 헐고 돌을 쌓아 밭뙈기를 일군 연유에 있을 것이다. 또 피아골에는 얼마의 곡식을 받고 대리모를 해준  종녀촌(種女村)이 있었다고도 하니 의지가지 없는 민초들이 먹고 살기조차 힘든 궁벽한 산골이었음을 말해준다.   

 

  나의 지리산 첫 산행이었던 걸로 기억되는, 30 년 전 파릇파릇한 20대 였을 적 그 핏빛 단풍을 보기 위해 성삼재에서 노고단을 넘어 피아골로 내려왔던 적이 있었다. 등산이란 개념도 별로 없었던 때라 입던 옷에 운동화 신고 나섰는데 단풍이나 계곡이 좋았다던지 이런 추억은 없고 길고 긴 피아골 계곡을 내려가느라 매우 힘들었던 것만 기억으로 남아있다. 몇 년 전 우연히 가 본 연곡사의 봄 풍경에 반해 자주 들리고는 했는데 피아골로 등산은 처음이다. 이번 산행은 직전마을에서 피아골산장 용수골 삼도봉으로 올라 불모장등으로 해서 직전마을로 돌아오는 코스다.

 

   도로변에는 울긋불긋 단풍잎들이 한창인데 어제는 비가 왔고 이날부터 추워진다는 일기예보에 따라 공기는 서늘하다. 연곡사는 피아골 초입에서 8km 들어온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아담한 절이다. 아침 7시30분 절 앞을 통과하려니 매표소에서 문화재 구역을 통과하니 입장료를 내라며 차를 막아 세운다. 일찌기도 나와있다. 절에는 안 들른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전에는 늘 연곡사에 왔기 때문에 당연하게 표를 끊었지만 산에 가는데도 문화재 관람료를 내라니 슬그머니 부아가 치민다. 신새벽부터 절 앞에서 옥신각신하기도 그렇기는 한데 매표소 젊은 청년도 그리 생각했는지 "아, 안되는데...그럼 두 장만이라도" 하면서 표 두 장을 내민다.          

 

   직전마을 도로변에 차를 대니 산아래 도로변 단풍나무와는 달리 산색은 이미 회갈색으로 변했고 나무들은 겨울채비를 위해 다투어 잎을 내렸고 낙엽이 된 단풍잎은 계곡이며 숲속에 수북하게 쌓여간다. 산길은 우리가 전세낸 듯 고요하고 아침 공기는 서늘하다. 몸의 온도를 올리기 위해 일부러 부지런히 걸어본다.    

   

 

 

   단풍이 붉게 물들면 소도 물들고 소에 비친 사람의 얼굴도 물든다는 삼홍소(三紅沼)를 지난다. 2주 전만 하더라도 가을의 절정을 이루며 불타고 있었는데 찬바람 한 번 분 며칠 사이에 잎을 내리고 산색을 바꾸니 이대장은 삼홍소 다리에 서서 "화무십일홍이라고 아무리 예쁜 꽃도 열흘 넘기지 않는다더니 단풍도 꽃인가 그새 다 져 버렸네"라며 중얼거린다. 

 

 

 

   피아골대피소에 도착하니 9시 30분이다. 직전마을에서 1시간 반 걸렸다. 대피소에는 지난 밤에 산위에서 자고 내려오는지 산객 몇이 부스스한 얼굴로 내려오고  대피소 의자에 서너 명이 햇살을 받고 앉아 있다. 5분간 휴식 후 용수골로 향한다.  피아골대피소에서 임걸령으로 진행하다 불로교에서 계곡으로 빠지면 용수골이다. 지도에 보면 '용수암'이란 표시가 있는데 계곡 중간에 둥글고 거대한 바위가 있으니 용머리바위 즉 용수암(龍首岩)이다. 근데 용머리를 닮지는 않았다. 이대장은 조금 다른 말을 한다. "이 계곡에 용수암이란 암자가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암자의 이름을 땄다면  용수암(龍樹庵)이 맞을 것이니 '용수(龍樹)'는 곧 불교의 중관사상을 주창한 인도의 '나가르주나'의 의역이다. 이처럼 정확한 유래와 관계없이 거꾸로 추정하여 갖다 붙인 지명은 허다하다.

 

  용수골부터는 계곡산행이지만 간혹 먼저 지나간 이들의 시그널과 채취가 길을 안내해 준다. 곳곳에 오래된 나무들이 바람에 허리가 부러지고 뿌리가 뽑혀 산객들의 앞길을 막으니 모진 풍우의 흔적을 이 계곡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산 아래에서 차를 타고 올 때 보니 상고대가 피었는지 멀리 주능선이 희껏희껏 보이더니 계곡 군데군데 소금 낱알 같은 싸락눈을 뿌려 놓았고 계곡물을 따라 맑은 살얼음과 작은 고드름도 살짝 달았다. 첫 얼음이다. 그래도 계곡물은 줄지 않고 우렁차게 흐른다.  "용수골은 저 꼭대기 낫날봉부근서부터 물이 흐르는 기라"  이대장 말이다.

 

 

  용수암

 

 

   능선에 올라서려니 왠 스님이 위에서 씩 웃으며 빤히 쳐다보고 있고 주위로 몇 사람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다. 근데 스님 낯설지 않은 얼굴이다. 반야봉 아래 묘향대 호림스님이다. "어, 호림스님이시네"하니 알아보는 체 하는데, 올 초 폭설이 내렸을 적 폭포수골로 내려간 다른 사람들과 혼동하는 듯하다. 촬영팀을 마중 나왔다고 하는데 그러고보니 선 자리가 노루목과 삼도봉의 중간쯤인 묘향대 가는 입구다. 호림스님은 "아침에 주능선에 상고대가 피어 장관이었다"고 촬영팀에게 말하나 촬영팀은 상고대가 뭔지를 잘 모르는 듯하다. 성삼재에서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오느라 지쳤는지 자리에 퍼질고 앉은 사람도 있고 작가인지 여성팀원도 있다. 어디서 온 뭐하는 촬영팀인지는 안물어 봤다. 12:20분 직전마을에서 4시간 반, 피아골대피소에서 3시간 걸렸다. 바로 삼도봉으로 이동한다.  

  

 

 

  낫날봉 삼도봉 날나리봉, 불모장등 불무장등 풀무장등

  삼도봉에 서니 바로 아래로 불모장등 능선이 억센 산줄기를 용틀임하듯 구비구비 섬진강으로 뻗어나가다 당재에서 잠시 숨을 죽이고는 황장산과 촛대봉에서 다시 그 기세를 도와 섬진강까지 내닫고, 화개재 아래 목통골은 가는 가을이 아쉬운지 아직 단풍빛으로 붉다. 하동과 여수 앞 바다가 눈앞에 얼쩡거리고 주능선 천왕봉 반대편 노고단 바로 위 반야봉이 한달음에 닿을 듯 지척이다. 노고단에서 섬진강으로 뻗은 왕시루봉 능선도 나보란 듯 기운차게 뻗었고, 영신봉에서 삼신봉으로 흐르는 남부능선도 한 허리를 감싸고 돈다.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지리산 남부능선을 두루 즐기는 안복을 누리니 지리산은 도대체 명당 아닌 곳이 없다. 이 산은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를 잇는 꼭지점이라 하여 '삼도봉(三道峯)'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원래 봉우리가 '낫의 날'처럼 휘어져 있고 날카로워 '낫날봉'으로 불리다 발음하기 쉽게 날나리봉으로 바뀐 것이라 하는데, 혹시 이 동네 저 동네 사람들에게 정을 준다고 '날나리봉'이란 별명이 붙은 것은 아닐까. 

 

  삼도봉에 앉아 점심을 먹고 불모장등으로 향한다. 불모장등(佛母長嶝)은 이태의 남부군에는 '풀무장등'으로, 요즘 대부분 지도에는 불무장등(不無長嶝)으로 되어있다. 반야봉에서 뻗은 능선이라 원래 '반야장등'인데 반야(般若)는 불모(佛母)와 같은 의미라서 중복을 피하기 위해 그리 부른다는 말도 있고, 모(母)와 무(毋)를 혼동해서 그리 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불무장등(不無長嶝)은 조금 억지스러운 조합이고, 대장간에나 있는 '풀무'는 더 이상하고... 해서리 단지 이넘 저넘 부르다 보니 모음조화에 의해 '불모'가 '불무'로 자연스럽게 변이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 망구 내 생각이다. 이대장 왈 "장등은 긴 능선이란 뜻도 있지만 등불이란 뜻도 있으니 반야봉에서 보면 솟아오른 것이 장등과 같아 불모장등이라 이름 붙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한다. 멀쩡한 사람 이름도 어느 날 개명을 하여 헷갈리는 경우가 허다한데 산 이름 좀 바꿔 부르는 것쯤이야 대술까 마는...

 

  이름이야 그렇다치고 반야봉에 갈 때마다 내려다 보이는 물굽이처럼 우아하게 휘도는 불무장등의 긴 능선을 보며 "불무장등 함 갑시다" 한 적이 있었는데 이대장 그 때마다 "갈 때가 있겠지요"하며 느긋했다. 이번 코스도 긴 능선을 다 하는 것은 아니고 일부 구간 맛보기만 하고 피아골 직전마을로 내려간다. 그러고보니 당재에서 황장산 섬진강까지의 구간은 2006.4.22 봄비 속에서 피아골에 내린 운해를 즐기며 이미 한 적이 있었다. 

 

  불모장등(1441m)에 도착하여 낫날봉을 되돌아보니 과연 낫날처럼 날카롭다. 햇살이 따뜻하여 배낭을 베개 삼아 한잠하니 행복하다.   

 

 

  불모장등

 무착대

 

  무착대(無着臺)

  불무장등(1441m) 정상에서 섬진강으로 가는 장등의 긴 능선과는 다른 직전마을로 하산방향을 잡고 내려가다 능선에서 잠시 빠져 무착대를 찾아든다. 들고나는데 3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묵어 길은 없고 다만 그 이름을 쫓아 간간히 스미어 드는 산꾼들의 흔적만이 길의 자취를 알린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누구에게 길을 물을 수도 없고 흔적마저도 아스라한 폐사지의 무엇을 만나려고 산꾼들은 먼 길 돌고 돌아 찾아드는 것일까? 

 

  사람이 진 가장 무거운 것이 마음이라고 한다. 그 짐을 털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겹겹의 산중에 홀로 서기도 해보고, 무착(無着)이나 응무소주(應無所住) 란 말에 의지해서 '무우(霧雨) 속의 표범'처럼 고독하게 수행을 이어가기도 한다. '무우(霧雨) 속의 표범'이란 말은 무우(霧雨)가 계속된 7일 동안 먹을 것이 없어도 그 속에 가만히 숨어 있을 뿐 산 아래로 내려가 먹을 것을 구하지 않는데 이는 자신의 털을 아름답게 보전하기 위해서였다는 남산현표(南山玄豹)의 고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산꾼들은 묘향대나 무착대 같은 산중 암자를 거쳐간 그 표범 같은 수행자들의 자취에서 향기를 맡고 이야기를 전할 따름이라.        

 

   10여분을 내려가니 무너진 축대와 낙엽에 묻힌 샘, 관목에 자리를 내준 넓직한 자리가 암자터였음을 말해 준다. 이대장은 샘이 살아 있음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샘에 쌓인 낙엽을 퍼내다가 옆에 선 내게 물세례를 안긴다. 무착대 앞에 전망 좋은 바위가 있으니 용머리처럼 생겼다. 올라서니 노고단에서 질매재 문바우등 느진목재 왕시루봉으로 이어지는 긴 능선이 서편으로 넘어가는 저녁 햇살을 비켜받으며 길게 누웠고, 눈 아래로는 가을을 떠나보낸 피아골의 긴 갈색 숲 가운데로 희끄므레한 자작나무  군락이 옹기종기 모여 다른 산색을 이룬다. 남으로는 백운산이 남부능선의 지리산 산줄기들을 받아주며 자신도 지리산군의 일원인양 당당하다. 그래서 지리산을 볼 때는 저 백운산도 함께 보아야 지리산이 더 품격이 있어 보인다.     

 

   "이대장!  저 백운산도 지리산군에 낑가 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긴 한데 섬진강이 막고 있으니..."  

 

  웅장한 대자연에 주눅이 들고 더 이상 눈길 머물 곳이 없어 엉덩이를 탈탈 털고 일어서 나오는데 어지러이 자란 관목 사이로 고무신 한 짝이 엎어져 뒹굴고 있다. 무착대에서 고무신을 끌던 암주는 한 짝만 남겨두고 어디로 가셨는가?  달마스님이 죽은 후 3년 뒤에 관 속에 짚신 한 짝을 남겨두고 한 짝은 지팡이에 둘러메고 총령을 넘어 서천으로 돌아갔다는데 혹시 스님도? 

 

   왕시루봉 능선 뒤로 땅거미가 내려앉을 시간 다시 능선으로 되돌아 나와 하산을 서두른다. 비탈진 산길에 낙엽이 수북히 쌓여 걷기가 까다롭다. 직전마을에 도착하니 17:10분이다. 9시간 반의 산행을 마친다.     

 

  피아골 연곡사

 

  "들어 갈라요?"

  "늦었는데 그냥 갑시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지나치면 아쉽긴 하지만 땅거미가 짙어지니 절집을 둘러보기에는 늦은 시간이다.

연곡사는 지리산에 있는 절집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고 자주 오는 곳이다. 대개의 규모있는 절집은 일주문을 지나 여러 개의 문을 거쳐야지만 주불을 모신 법당에 이를 수 있는데, 연곡사는 일주문에서 대적광전까지 막히는 것이 없이 바로 올려다 보이는 소박한 절집이라 일주문 앞에 서면 대적광전 열린 문으로 비로자나불을 환하게 만날 수 있다. 크지 않은 규모인지라 전각의 배치가 아기자기 하고 선암사 해우소와 비슷한 오래된 뒷간이 좋고, 특히 절 뒷편 언덕 동부도와 북부도에 베풀어진 조각상들, 아침동살이 비쳐들면 기지개를 켜고 살아나 호시탐탐하듯 조각된 서수들과 소리없는 음악을 연주하는 가릉빙가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들을 절차탁마하던  장인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 더 좋다. 

 

   2009.4.2 아침에 우연히 만난 연곡사의 풍경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데, 봄날 절집 마당 3층 석탑을 배경으로 아침 햇살을 받으며 매화꽃과 벚꽃이 눈송이처럼 피어 화사한 향기를 흘리는데, 앞산 왕시루봉 능선에는 봄눈이 꽃송이처럼 내려앉고 그 눈송이들을 거친 봄바람으로 허공속에 연무로 휘날리는 산, 그것은 곧 우주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얼마 전에 가 본 연곡사는 새로 능력 있는 주지스님이 오셨는지 불사를 벌여 일주문에서 대적광전 사이에 설법전이라는 전각을 지어 환하게 통하던 절집 아래 위를 차단해 놓았다. 일주문 바깥의 중생들과 대적광전의 부처님 사이를 갈라놓은 것이니 마음속에 아름답게 남겨져 있던 연곡사는 격식만 갖춘 여느 절집처럼 되고 말았다. 게다가 대적광전 옆에는 원통전이라는 전각도 새로 세워 놓았고 해우소 옆에 신식 화장실도 지었다. 그러니 고즈넉한 옛 맛과 멋은 사라지고 넓지 않은 절집이 혼잡스럽게만 느껴졌다. 사람들이 산속의 절집을 좋아 하는 것은 그것이 자연의 일부로 건축되고 조화될 때이지 자연에서 일탈되고 어긋날 때가 아닐 것이다. 하여 연곡사 그 아름답던 절집도 이제부터는 일부러 찾아 올 날이 있을지 모르겠다.   

 

2009년 어느 봄날의 연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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