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 2013.12.25(수) ○ 코스 : 양정마을 입구 07:30 - 영원사 부도밭 - 영원사 - 도솔암 - 전망대 - 영원재 - 영원봉 - 빗기재 - 삼정산 - 상무주암 - 양정마을 입구 18:30 ○ 인원 : 4명 (이재구 한영택 박노욱 염기훈)
『영원사의 부도밭, 청매스님의 방광사리탑, 회암당 부도 등의 문화유산. 지리산의 기막힌 수행처 도솔암, 상무주암. 영원봉과 삼정산 그리고 능선에서 바라보는 장쾌한 지리조망』 산은 별로 안보이고 부도와 절만 보이는 이번 코스는 문화재 답사나 삼사 순례같기도 하지만 기대도 되고 또 얼마나 끌고 다닐지 궁금하기도 하다. 별빛 쏟아지는 동짓달 긴 밤하늘에 이는 새벽바람을 맞으며 집을 나서자니 을씨년스럽지만 한달만에 만나는 산행동지들이 반갑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겨울산에 대한 그리움으로 움츠러드는 것은 잠깐이다. 지리산 출입금지 기간을 피하고 또 날을 서로 맞추다보니 작년에도 그랬던 것처럼 크리스마스날 산행하게 되었다. 고속도로를 냅다 달리는데 서쪽 하늘에 유난히 큰 별 하나가 길을 밝힌다. 마천에서 백무동으로 들어가다 벽소령 가는 오른편 도로를 따라가면 양정마을이 나온다. 이 동네에는 양정 음정 하정 세개의 부락이 있고 삼정산 아래에 있어 삼정마을이라고도 하는데 마을 입구에 차를 대고 7시30분 산행시작이다. 임도를 따라가다 마을 끝자락 쯤에서 좌측 영원사 옛길과 포장도로 사이 능선으로 붙어 오르다 임도를 가로질러 영원사 부도밭으로 향하는데, 눈이 내려 뽀득그리는 부드러움이 발 아래로 전해지는 산길로 맷돼지가 먼저 지나간 발자국을 따라 막 밝아오는 동살에 비친 네 개의 그림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따른다.
첫 능선을 지나 임도를 가로질러 조금 지나니 영원사 부도군이 나타난다. 좌로부터 영암당(靈巖堂), 설파당(雪坡堂), 중봉당(中峯堂), 청계당(淸溪堂), 벽허당(碧虛堂)탑이다. 설파당탑의 주인장은 설파상언(雪坡尙彦 1707-1791)으로서 함양 남덕유산 아래 영각사를 창건하고 화엄경판을 새긴 분으로 알려져 있으나 나머지 부도의 주인공들은 알려져 있지않다고 한다.
傳 靑梅印悟 (1548-1623) 방광사리탑 영원사 부도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언덕 조금위에 홀로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부도가 서 있다. 청매선사 사리탑으로 전해져 오는 탑인데 다른 부도와는 달리 당호(堂號)가 새겨져 있지 않아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다른 승탑(부도)과는 달리 지대석 위에 소박하나마 앙련을 새긴 하대석을, 2층으로 된 8각형의 탑신과 옥개석(지붕돌) 등 신라 하대 이래 사리탑의 형식미를 갖추고 있어 일반적으로 보아오던 조선시대 옹기형이나 석종형 부도와는 그 양식을 달리하고 있다. 탑신이나 지붕돌을 꾸미는 장식조차 없는 졸박(拙撲)함과 탑신에 당호를 새기지 않음으로써 이름을 버리고 자연의 일부로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최순우의 표현을 빌리자면『장식 미술에 나타낼 수 있는 본질적인 아름다움의 기교를 너무나 정통으로 찌른 느낌』이랄까. 탑의 형식으로 보아 연곡사 동부도와 닮은 점이 많고 청매선사가 말년에 연곡사에도 주석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상좌들이 (신라하대에 조성된) 아름다운 연곡사 부도를 보고 사리탑을 모방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신라하대 선사들의 사리탑은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추진되었지만, 억압받고 탄압받던 조선의 절집에서 그것도 임란 이후 궁핍한 산골의 중생들에게서 시주 받아 이만한 사리탑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청매선사의 공덕이리라! 청매선사의 쓸데없는 짓 청매선사는 서산대사의 제자로서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웠고, 전란이 끝나자 부안(扶安) 아차봉의 마천대(摩天臺) 기슭에 월명암을 짓고 살다가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와 여기 삼정산 영원사에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입적하자 절에 불인 난듯 환했다고 하고 또 다비를 한 후 사리를 모실 사리탑을 영원사 동쪽 능선에 세웠는데 때로는 환하게 빛을 발해 방광사리탑이라 불렀다고.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절 가까운 현재의 자리로 옮겼더니 그후 부터는 빛을 발하지 않게 되었다는데, 청매영감, 가려면 곱게 갈 일이지 쓸데없이 중생들을 미혹하는 장난을 하다니....바람없이 양지바른 능선 동살이 비쳐드는 눈밭에 홀로 선 고졸한 사리탑에 엎드려 절하고 되돌아 나오니 사리탑을 품고 있는 겨울 지리산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해발 920미터에 위치한 영원사는 통일신라시대 영원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데, 9개동의 건물에 100칸이 넘는 대찰이었으나 여순사건과 6.25 때 공비토벌작전으로 아군에 의해 완전소실되었으며 그후 상무주암에 주석하던 대일스님이 원을 세워 초막을 짓기 시작한 것이 변하여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영원사에 보존되어 있는 조실안록(祖室安錄)에 따르면 서산대사의 스승인 부용영관, 서산, 청매, 사명, 징안 및 화엄보살로 불리던 설파상언 스님 등 조실스님만 109명이 기록되어 있고 재도 봉행하고 있단다. 창건주 영원대사가 누구인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하는데, "선종의 법맥을 기록한 책인 《전등록》에 보면 임제 의현선사(?-867)의 제자 중 '신라지리화상'이 있는데 이분이 곧 영원조사라고 영원사에서 말한다"고, 이재구 말이다. 우리나라 선사들의 비문에는 대부분이 임제의 적통임을 기록하고 있다고 하니 그럴 수도....과거의 화려했던 사찰의 이미지는 없고 조그만 암자로 남았지만 역사가 오래되었으면 이야기꺼리가 없을 수 없는 법이다. 영원대사와 문수보살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영원대사가 입산하여 토굴을 짓고 8년을 참선 수행을 하였는데 여전히 깨우침을 얻지 못해 '나는 안되는 갑다'하고 짐을 싸서 산을 내려가는데 한 노인이 물도 없는 산에서 낚시대를 드리우고는 "내가 여기서 8년을 살며 낚시질을 했는데, 2년만 더 있으면 큰 고기가 낚일 것이다."하고는 사라졌다. 영원스님은 그 말에 느끼는 바가 있어 다시 토굴로 돌아와 더 수도 정진한 끝에 2년 후에 득도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노인은 문수보살이었을 것이고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영원대사와 문수보살 이야기나 원효스님에게 월경개짐을 빠는 여인으로 나타난 관음보살, 무착대사에게 팥죽쑤던 주걱으로 얻어맞은 문수보살 등 보살이 까메오로 등장하는 이런 설화는 더러더러 있는데 이적이나 신비함을 강조하려는 것보다는 주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에게 포기하지 말도록 응원하는 스토리다. 이를테면 짐을 가득실은 리어카가 힘들여 고개마루에 이를 때 밀어주는 것이 아니라 다왔으니 힘내라며 박수쳐 주거나, 완주를 코 앞에서 포기하려는 마라토너에게 응원해 주는 관객에 그치는 것이 불보살의 역할이다. 제 업은 불보살도 어쩌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영원암에서 임도를 따라 내려오다 계곡을 만나는 지점 인근에서 우측으로 도솔암을 찾아 오른다. 명선봉과 영원재 사이 삼정능선의 중간지점 아래 쯤인데 눈길을 밟으며 올라가니 숲이 좋고 편안하여 뒷산 절집 찾아가는 느낌인데 하늘이 환하게 열리며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엮은 키낮은 담장이 앞을 가리며 사립문이 나온다. 사립문에는 출입을 삼가해 달라는 스님의 간곡한 호소문이 붙어있지만 중생이 절집 드는데 막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는 배짱으로 안으로 들어선다. 인기척도 없는 절집 마당은 적막하여 나그네 넷이 주인장 노릇을 한다. 성탄절이라 스님은 교회 가셨나?
도솔암에 서니 하얀 눈밭으로 변한 뜰안으로 눈부시게 고운 햇살이 알알이 내려앉고, 천왕봉 등 주능선이 눈앞으로 다가오며 그 위로 햇살에 눈부신 흰구름이 바람을 타고 흐른다. 삼정능선을 병풍으로 삼고 지능선을 바람막이로 둘러 지리주능선을 마주하는 곳에 도솔암이 있으니 미륵이 산다는 도솔천(兜率天)이 바로 예가 아닌가 싶다. 이렇게 눈맛이 아름다운 곳에 찾아들어 절집을 점지한 안목을 지닌 이는 대체 누구였을까. 56억7천만년 후에나 도솔천에서 이 세상에 나투실 보살인데 중생들은 어서 하생하여 살기좋은 불국토에서 걱정없이 살아가도록 조치해 주기를 조르기라도 하는건지 호젓한 법당에 미륵보살 한 분 모셨다. 그러나 구마라즙이 번역한 『불설미륵하생성불경』등에서는 반드시 언제라도 기약없이 미륵이 하생(下生)하여 성불하는 내용을 소상하게 기술해 놓고 있으니 난세를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서 좋은 세상에 살기를 바라는 염원 때문일 것이라. 법당에 들어가 내 절 삼 배 올리고, 박노욱 꺼 삼 배 더 올리고 (박노욱이 시줏돈을 내밀었다), 밖에 나와 대롱을 타고 흐르는 약수를 한 입 가득 마신다. 풍경에 취해 사진을 찍고 한참을 머문다. 며칠 요사체 방안에 머물며 창밖을 앉아서도 보고 누워서도 보고 엎드려서도 보고 거꾸로 서서도 보고 뒹굴뒹굴 이불 속에서도 보는 풍경을 상상도 해 본다.
시간은 머물어 주지 않는지라 도솔암 뒤 전망대로 가서 잠시 바라보다 능선으로 향하는데, 이제부터는 인간의 자취도 없는 눈길을 헤치며 나가는데 경사가 심하고 무릎까지 빠지는 산길이다. 이대장 앞장 선 발자욱을 다음 사람들이 그대로 따라 밟으며 나아간다.
눈길을 헤치고 능선에 도착하니 12:30분, 밥 때다. 마침 자리를 가지고 오지 않아 눈위에 도시락을 펴고 라면을 끓이고 하니 우리 밥 잘 먹으라고 바람한 점 없이 고요하다. 따스한 별 등에 지고 유마경 읽노라니 만해 한용운 스님의 시 春晝다. 떨어지는 꽃이 바로 經이고 따스한 볕이 法이니 산 위에서 마시는 술 한잔도 '나무소주보살'이 되고, 마누라가 싸 준 밥 한 술은 '나무밥보살'이 되어 산 속 중생들의 속을 데우고 원기를 북돋운다. 그러고보니 천지에 법 아니고 보살 아닌 것이 없다. 진강스님 같은 양반은 젊은 나이에 한소식 하면서 "세상천지가 진신(眞身) 아닌 것이 없는데 오줌은 어디다 누란 말이냐"며 일갈했다던데...
15:50 영원봉 도솔암에서 올라서 보니 겨울 명선봉이 눈앞에 다가와 있고 뱀사골 쪽 명선남릉이 북으로 길게 뻗었고 백무동 쪽 오공능선도 긴 뼈대를 드러내고 있다. 삼정능선에서 영원령까지 산길은 거칠고 험했다. 영원봉까지 "눈 없으면 30분 눈길이라도 40분" 하던 이재구 앞서 내빼고 뒤에 따라가며 눈길을 오르락 내리락하니 기운이 다 빠진다. 영원재에 이르러서 박노욱은 더 못가겠다며 영원사 쪽으로 혼자 빠져 내려가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보니 눈이 쌓여 길도 없어보인다. 잘 알지도 못하는 겨울 산을 혼자 가는 것은 초상을 치러야 할 수도 있으니 한사코 말려 영원봉까지 오르니 힘들었던 피로가 싹 가신다. 영원봉에서 보는 지리산 겨울 풍경은 참 일품으로서 지리산 깊숙히 있기 때문에 천왕봉 반야봉 만복대 바래봉 등 겨울 지리는 제 속살을 두루 보여준다. 지리 주능선에는 어느덧 먹장구름이 덮었고 만복대 너머 서산에도 석양이 구름 속으로 숨어들었다. 많이 지체되었다. 영원봉에서 삼정산까지는 눈길의 발자국으로 보아 누가 다녀갔다. 길이 좋다. 회암당 사리탑 앞서 가 영원봉에서 기다리던 이재구 "늦었다. 어둡기 전에 빨리가야 부도를 볼 수 있다"며 채촉한다. 삼정산 상무주암 근처에 두어 달 전에 새로 발견된 사리탑이 있는데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다. 이대장, 얼마전 부도의 사진을 보고는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러 왔다고 한다. 자료를 뒤져보고 조선조 스님 중에 晦庵은 定慧大師(1685-1741) 혼자 뿐인데 김천의 청암사에 그의 비문과 사리탑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그곳까지 직접 찾아갔대나 우쨋다나. 청암사 종무소에서 부도를 모신 곳이 외부인 출입금지구역이기 때문에 이대장에게 들어가지 못하게 했고, 그런다고 포기할 이재구 아니라며 GPS지도로 위치를 확인하고는 샛길로 들어가서는 부도와 부도 표지비를 확인하고 사진을 찍어 왔다고.. 『비문에 "부도를 세워 정골(頂骨)사리를 불령산과 지리산에 봉안하였다"는 글이 있어 곧 여기 삼정산 부도가 청암사 회암당 부도와 동일한 정혜대사 부도임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晦庵은 원래 성리학자 주희(朱熹, 朱子)의 호로서 유학자들에게는 거의 신급인 존재인데, 중이 법호로 晦庵을 썼으니 당연히 가만히 있을리 없을거고, 유생들이 지랄지랄 하는 바람에 晦堂으로 고쳐 불렀고, 유학자인 조현명(1690-1752)이 지은 그의 碑에도 '회당대사비명'으로 되어 있으나 뒤에 제자들이 세운 부도에는 '회암'으로 복원시켜 놓았다.』 이상이 청암사에서 비문을 읽어보고 밝혀낸 내용과 상무주암 인근에 있는 회암대사 부도를 찾아가는 과정과 연유를 이대장이 말하는 것이다.
부도는 2012.1월 영원봉에서 시산제를 지내고 점심을 먹은 상무주암 인근 소나무 좋은 너럭바위 아래쪽에 위치해 있어 평소 조금만 눈여겨 보면 쉽게 볼 수 있는 곳인데도 그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길에서 내려가 보니 넓직한 터 하며 인근 상무주암에서는 진작부터 알고 잘 관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육안상으로는 명문이 잘 보이지 않아 눈을 묻혀 쓸어보니 '晦庵堂'이란 명문이 어렴풋이 나타난다. '어두울 회晦'자를 쓰는 것은 대개 스스로를 낮추는 의미다. 퇴계(退溪)나 율곡(栗谷)과 같이 물이 흐르는 낮은 곳을 의미하는 溪자나 谷자도 마찬가지. 열성적인 이재구 줄자를 가져와서는 아래 위 높이 둘레 지름을 재고 적는다. 학예관이나 학자 같은 직업이 어울릴 것 같은 인물이 직업을 잘못 택해 수금이나 하고 있으니....그러면서 본인은 스트레스 같은 것은 안받는다고 큰 소리는 땅땅친다. 우쨋든 회암선사 부도가 김천 청암사외에 여기에도 있는 연유는 모르지만 상무주암과 어떤 인연이 있지 않을까. [사리를 나누어 여러 곳에 탑을 조성하는 것은 부처님 때 부터 있었던 일이다]
해가 지니 더 머물지 못하고 하산을 서두른다. 상무주암에는 벌써 불이 켜졌다. 필단사리탑 담장 앞을 지나며 목을 축이고 전망대인 동대(東臺)에 들러 주능선 눈요기 한 번 더 하고 하산하니 산길은 어느새 어둠이 내렸다. 후래쉬 없이도 걸을만하여 천천히 내려오니 앞서 임도까지 내려 간 이대장과 한영택 아래에서 후래쉬를 비춰주며 "후래쉬도 안켜고 내려 오노!"하고 소리친다. "눈에 불을 켜고 가니 어두워도 잘 보인다!" 당초 9시간 반 정도 예상 했던 산행시간이 11시간 걸렸다. 새피하게 보았던 삼정능선이 오히려 오라지게 힘들었던 겨울 산행이되었다. 그래도 겨울산의 묘미는 산줄기의 하얗게 헐벗은 모습을 산정에 서서 가만히 보는 것이라. 게다가 눈맛 좋은 작은 암자에서 노닥거리는 재미라도 있으면 비단옷에 꽃을 걸치는 격이고, 고즈넉한 곳에 눈을 지고 있는 탑이라도 만날라 치면 도랑치고 가재잡는 날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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