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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모음

'14 년 삼신봉 시산제

by 하얀 사랑 2014. 2. 3.

지리산 삼신봉에서 시산제를 지내다
[염기훈 2014/01/27 12:53]

○ 일시 : 2014.1.18(토) 

○ 산행코스 및 일정

    거림 - 운주선원 - 동삼신봉 - 미륵암터 - 삼신봉[시산제] - 한벗샘 - 자빠진골 - 거림

○ 인원 : 8명 (이재구 송건주 김택영 박노욱 이동욱 한영택 권명환 염기훈) 

 

 

 

     2014년 정월 18일 지리산 첫 산행이다. 당연히 시산제를 지내야 하니 지리산에 한 번이라도 발을 담근 실적이 있는 늠들은 모두 참가하는 것으로 했다. 모아보니 모두 8명 차 두 대다. 이재구, 장소는 천왕봉이 잘 보이는 삼신봉으로 택하고 제물을 할당하며 잔소리 몇 가지를 메일로 적어 보낸다.

 

     『제물은 집에 먹던 것 대충 가져오지 말고 성의있게 준비하시고,  힘든 겨울산행임을 감안하여 전날 술 마시지 말고, 아침에 목욕재계하고, 3일 전부터 부부관계 멀리하시고, 시간 늦지 말고...교대앞 05:10, 안 기다림』

 

  지가 산행대장이면 대장이지 부부사 까정 통제하려는 심보는 뭣하긴 하지만 지난 일 년 안전 산행했고 또 올 지리산 일 년 농사 미리미리 신령님께 정갈한 마음으로 아부 하자는 것이니 다 용서가 된다.    

 

  덕산에 도착하니 아직 깜깜한데 나뭇가지 사이로 서쪽 하늘에 둥근 달이 걸려있다. 전 번에 갔던 식당은 문을 열지 않았는데 작은 동네라 새벽에 문여는 식당이 없는 것 아닌가 했는데 다행히 두 군데 불을 켜놓았다. 재첩국집에 들어가니 아직 밥에 안되었다며 기다려야 한단다. 다른 한 식당으로 가서 ok, 막걸리 한 잔씩 돌리며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거림으로 간다. 

    

 

 

  07:50 거림에서 세석가는 등산로 초입 약간 못미친 곳 천황사 앞에 차를 대고 바로 옆 운주선원 가는 계곡으로 철다리를 건넌다. 지리산행 8명은 처음인지라 사람이 많으니 내딛는 발걸음도 뿌듯하고 듬직하다. 능선을 가로질러 400여미터를 오르니 고개마루다. 바로 능선을 따라 올라가지 않고 운주선원을 잠시 들렀다 오기 위해 내려간다. 가파른 산중인데도 밭을 일구려고 넓게 파헤치고 있는데 길 아랫편 밭 가운데 한 기의 부도가 횡그러니 서 있다. 내려가 보니 조선후대의 석종형 부도다. 길 윗쪽 기슭에  2기의 받침돌이 남아 있는걸로 보아 부도는 위에서 아래로 굴러온 것을 누군가 밭 가운데 세워놓은 것 같다. 새겨진 당호는 영월당[影月堂]으로서 물속에 비친 달그림자처럼 자취를 남기지 않겠다는 선사의 뜻이리라.

 

  길따라 모퉁이로 돌아 들어가니 운주선원이다. 겨울 산중의 아침이라서 그런지 나그네들이 끓어도 절집은 인적 없이 조용하다. 요사체 위쪽 언덕을 넘어 올라서니 아담한 대웅전이 숨어있고 오른편 바위 암벽에 마애불이 모셔져 있다. 근데 아마추어 석공이 조각한 듯 짜임새와 품위가 바위의 본 모습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한 듯하다. 근래에 새긴 모양인데 그러나 부처에 미추[美醜]가 어디 있겠는가. 얼른 절하고 되돌아 내려오면서 아랫편 조릿대 숲 기슭에서 덕암당[德庵堂] 사리탑 1기를 더 만난다. 덕암당 사리탑은 석종형 몸통에 둥근 공모양의 머릿돌을 이고 있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양식이다.

 

   운주선원이 위치한 곳은 거림에서 내대천 계곡과 능선을 넘어야 하는데, 지도를 보면 이곳 아랫편에 '은암'이란 절터가 더 있는 것을 보면 옛부터 여기가 수행하기 좋은 환경이었다던지 뭔가 잇점이 있었을 것인데 이대장은 여기가 옛 유산기에 더러 나오는 남대암이 아닐까 추정한단다. 조선중기 명암 정식[明庵 鄭拭 1683-1746]의 청학동록에 천왕봉을 오르면서 남대암에 유숙한 기록이 있는데  "처마와 창문은 퇴락했고 단청은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아흔살의 노승이 밤새도록 《금강경》을 이야기했다."고 했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겨울을 나는 지금의 운주선원도 매우 추워보인다. 

 

 

 

 

 

 

 능선길 초입

 

 운주선원에서 돌아나와 처음 올라왔던 능선으로 되돌아간다. 동(외)삼신봉으로 가는 산길은 우거진 조릿대가 산길을 점거하여 앞길을 막고  얼굴을 찌르기도 한다. 앞에선 이대장은 이런 것은 약과라며 조릿대에 눈이 쌓여 길을 막고 있을 때는 참으로 난감하다고 오늘 눈이 없어 다행이라고 말한다. 눈이 온지가 좀 지나서인지 산길에도 쌓인 눈은 별로 없어 산행하기에는 괜찮았지만 운주선원 입구에서 동(외)삼신봉 가는 2시간 거의 조릿대를 헤치느라 욕봤다.     

 

  

 

  올라올 때 삼신봉과 천왕봉 쪽인 북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해는 왼편에 계속있어 뭔가 방향감각을 상실한 느낌이 들었다. 산에서 지도를 지니지 않고 있으니 헷갈리기가 가시덤불에 연줄 엉키듯 엉망이다. 동(외)삼신봉에 도착하니 11:00다. 비로소 사방을 보니 여기가 어디쯤인지 감이온다. 삼신봉은 좌우로 팔을 벌려 내삼신봉과 외삼신봉을 이루는데 청학동 쪽에서 외삼신봉을 보면 바깥 쪽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묵계 쪽에서 보면 반대로 보이니 어느게 안팎이냐며 명칭을 가지고 동네끼리 다툼도 있었던 모양이다. 삼신봉의 동쪽에 있어 외삼신봉을 동삼신봉, 서쪽에 있는 가장 높은 봉인 내삼신봉을 서삼신봉이라 하기도 한다.  동(외)삼신봉 선 자리는 영신봉에서 삼신봉을 거쳐 김해로 이어지는 낙낙정맥구간이다. 바람이 불고 날이 차가워 바로 아래로 바람을 피해 막걸리를 마시려 내려선다. 막걸리를 꺼내자마자 이대장 퍼뜩 한 잔 따라놓고 "우짜든동~" 하며 절한다.

 

 

   "여기까지 왔는데 언제 또 오겠노 미륵암터 가보자"

 

   미륵암터는 동삼신봉에서 청학동 방향 서남쪽으로 10여분 비탈길을 타고 내려간다. 암자는 전란 전까지는 있었다고 하는데 제법 넓은 터라 수행처로서는 좋아보인다. 이대장은 여기도 음양수 샘이 있다며 알려주는데 바위 아래 양수와 음수가 나오는 곳이 다른데 한 곳으로 합쳐져 음양수샘을 이룬다고 한다. 바위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 새겨져 있어 절터였음을 알려준다.  이곳은 비록 산 정상에 가까운 곳이지만 청학동에서 그리 멀지 않아 절집 환경으로는 그리 나빠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누군가 음양수 샘물을 이용하려고 호스를 댄 흔적도 남아있다.

 

  [바위에 '미륵암중수기념' 각자가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미륵암터를 검색하다 사진을 우연히 발견했다. 

 

   (彌勒庵重修記念 勝山菩薩 具??, 和尙菩薩 金?? 中元甲壬午三月) → 출처 : 지리99

 

  해석해 보자면 보살 두 명은 시주자 이름 같고  다음에 壬午는 1882년이나 1942년이니 추정하자면 1942년 일제말쯤 미륵암을 중수했다가 이후 지리산 빨치산활동이나 전란통에 다시 폐사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중원갑[中元甲]은 음양설에서 시대변화의 큰 단위로 잡는 세 묶음의 육십갑자[六十甲子] 가운데 둘째 육십갑자의 60년이라 한다.]

 

   미륵암을 둘러보다 다시 외삼신봉으로 올라가려니 4명 뿐이고 나머지는 보이지 않는다. 혹시 우리를 못보고 지나쳐 저 아래로 더 내려갔나 싶어 몇 번을 부르다 전화해보니 내려오지 않고 바로 삼신봉으로 가고 있단다.   

 

   과거의 흔적을 쫓아 폐사지를 찾아드는 것은 허허로운 일이다. 횡하니 빈 절터에서 깨어진 기왓조각 한 점을 보고는 옛 흔적을 더듬어 반추하고 바위틈에서 졸졸 흐르는 샘이라도 발견할라치면 옛 공양주 보살을 만난듯 반갑고 혹시 바위에 새겨진 글자라도 발견하면 잃어버린 역사를 만난듯 기분이 UP된다. 한 기의 부도라도 만나면 선사를 뵌 듯 경건해 지지만 폐사지 하늘로 횡한 바람이라도 한 점 지나노라면 제행무상[諸行無常]의 현실을 실감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음조차 허허로와지는 폐사지를 찾아드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이들이라.           

  

  청학동에서 삼신봉으로 올라오는 삼거리  

   삼신봉[三神峰]

 

  삼신[三神], 삼신봉[三神峰], 삼신산[三神山] 

  절에 가면 흔히 대웅전에 세 분의 불상를 모시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三이란 숫자는 종교에서 많이 보이는데, 멀리 인도의 베다 시대부터 있었던  힌두교의 三神(트리무르티 : 창조의 신 브라흐마, 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쉬바), 대승불교의  三身佛(法身佛 報身佛 化身佛)사상,  기독교의 삼위일체, 태양 안에 산다는 세 발 달린 상상 속의 까마귀 삼족오[三足烏] 등이 있고, 민간 신앙에서 아기를 점지해 주는 삼신할매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돌봐줘야 할 인간들도 많기도 하거니와 솥다리도 세 개가 있어야 균형을 잡고 선다고 신도 늘 역할분담과 균형 그리고 통합이 있어야지만 되는 모양인데, 궁금했던 것이 지리산 삼신봉[三神峰]의 삼신[三神]은 무엇을 의미할까였다.    

 

  우리나라 민간에 전승되어 오는 이야기로서 한라산을 베고 누워 한 다리는 서해에, 또 한 다리는 동해에 두고 손으로 땅을 훑어 산과 강을 만들었다는 우리민족의 생성신화인 마고의 전설이란 게 있다. 또 지리산 반야봉 마고할미, 노고단 노고할미, 천왕봉 선도성모 등 마고할미와 관련한 전설도 있고, 신라 눌지왕 때 박재상이 쓴 부도지에도 창조의 神인 마고[麻姑]와 두 딸 궁희 소희 세 신[三神]에 대해 언급한 것도 있다. 정사인 고려사에도 마고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고려 충혜왕이 폐위되어 원나라에 잡혀가다 중국의 악양현에서 죽었는데 폭군이었던지 백성들이 기뻐하며 『아, 마고의 나라, 이제가면 언제 오나[阿也 麻姑之那, 從今去何時來]』라는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 점 등으로 보아 옛부터 마고 신화는 한반도 전역에 널리 퍼져있었던 모양이다. 해서 삼신봉의 삼신[三神]은 마고할미와 두 딸이 아닐까 생각도 해 보는데...  

 

  이대장의 주장을 보자면 三神山의 개념은 중국의 신선사상에서 차용하여 봉래산[蓬萊 금강산], 방장산[方丈 지리산] 영주산[瀛洲 한라산]을 三神山으로 불렀으니 산 자체를 신령스럽게 보는 것으로서 어떤 인격신에 대한 개념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고. 지리산이 삼신산 중의 하나이고 지리산 중에서도 가장 경치가 빼어난 화개골이 삼신동[三神洞]이 되었을 것이고 해서 쌍계사도 일주문에 삼신산쌍계사[三神山雙磎寺]라고 쓰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삼신봉'이란 이름 자체는 하동의 관찬지리지나 군현지도에 표기가 없다고 하니 '삼신봉'이란 산 이름은 근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또 봉우리가 나란히 3개이니 그냥 '삼봉'으로 부르다가 삼신산과 관련하여 삼신봉이 되지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나의 이런 생각에 대해 이대장은 다음과 같이 말을 보탠다.

 

  "'삼신'의 개념과 '삼신산'의 개념, '삼신봉'의 개념이 한 군데서 나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예를 들어 삼신이 정의되었다고 해서 즉, 삼신이 부엌신 성주신 조상신이라고 해서 삼신산이 그 삼신을 모신 산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기원이 각각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름 가지고 왈가왈부 하는 것 조차 부질없는 짓일런지도.

 

 

  싸락눈을 뿌리는 삼신봉에서 경건하게 시산제를 지낸다. 격식을 갖춘 제물을 진설하고 이대장이 축문을 낭낭하게 읊으며 올 한해에도 아낌없는 후원을 기원드린다.

 

    祝 文

 

   甲午年 정월 열여드렛날,

   장엄한 지리산 능선 한눈에 바라보이는 삼신봉에 올라

   天地神明과 智異山神靈님께 엎드려 告합니다.

 

   백두산 흘러내려 지리산으로 솟구치고,

   저기 눈 덮인 지리능선 굽이쳐 흐르는데,

   아, 이 아득한 天地間에 우리네 몸은 한알 좁쌀이라,

   우리의 一生이 잠깐임을 슬퍼하고 山川의 끝없음을 부러워합니다.

   그리하여 다함이 없는 저 宇宙의 기운을 즐기고 싶어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이 여기 모였습니다.

 

   주인 없는 저 바람과 햇살을 듬뿍 안고 하늘 아래 우뚝 서서

   눈을 들어 어슴프레한 천왕봉에서 반야봉까지 한 눈에 담고

   팔을 벌려 천봉만산을 가슴에 품으니

   호기로운 마음 천지에 가득 차

   세상에 어떤 통쾌함이 있어 이것에 비길 것인가 싶습니다.

 

   지난 해에도 신령님의 보살핌으로

   안전하고 즐거운 산행을 하였습니다.

   오늘 저희가 甲午年의 뜻깊은 첫 지리산행을 시작하면서

   神靈님께 한잔 술을 부어 올려 한해의 無事故 山行을 祈願하오니

   바라옵건대,

   작은 정성이나마 거두어 주시고

   올해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 산으로 들고 날 때

   항상 넉넉한 보살핌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비나이다.

 

  시산제를 마치고 바로 옆으로 자리를 옮겨 둘러앉아 점심을 먹는데 탕국을 데우고 생선과 돼지머리를 덥히니 이건 뭐 잔치상이다. 다들 정성을 들여 음식을 해 온 덕분에 산위에서 진수성찬을 맛본다. 추위 속에서도 뜨끈한 국물과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속이 따뜻해진다. 술잔이 오가면 농담도 따라 다니는 법, 시산제  3일전부터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라 하여 한 늠은 3일전부터 마누라 근처에도 안갔다며 자랑하는데, 3년전부터 딴 방 쓰고 있다는 늠도 있고, 자기는 평생 2번 밖에 마누라 옆에 안갔다면서 뻥을 치는 늠도 있다. 그 증거가  "딸 하나, 아들 하나"라나 

 

  그나저나 지리산 남부능선의 가장 으뜸인 삼신봉에서 시산제를 지낸 것은  남부능선에서 눈덮힌 주능선을 보는 것인데, 오늘따라 날씨가 오락가락하여 진눈깨비가 내리니 산 시계가 흐려 천왕봉이며 주능선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시산제를 마치고 점심을 먹고 하산을 서두른다. 하산은 남부능선 한벗샘까지 가서 자빠진골로 내려가는 것이다. 2012.9산행시 영신봉에서 한벗샘까지 와서 자빠진골로 내려간 적이 있으니 영신봉에서 삼신봉까지의 남부능선은 이번 산행으로 완주가 되는 셈이다. 남부능선 산길은 비교적 평탄하고 높낮이가 덜해 수월하다. 

 

  한벗샘은 안부 바로 아래 자빠진골의 발원지다. 이후 거림까지 계곡(자빠진골)을 따라 하산한다. 자빠진골 반대편이 대성골이다. 자빠진골은 계곡 자체가 깊지 않아 물이 땅위를 흐르는 듯하고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지나자면 잘 자빠진다하여 이름이 붙었다는 주장도 있을 법하나 계곡이 비스듬하게 완만하여 누워있다는 의미로 해석을 더 많이 하더라. 지랄하고 '자빠졌다.'는 의미는 지랄하고 '누워있다'는 뜻 아닌가벼? 실제로 위 능선에서 보니 계곡 자체가 아주 완만하고 넓어보였다. 

   

 

  계곡을 타고 내려와 세석에서 내려오는 내대천에 다다르니 오후 4시가 조금 넘었다. 겨울 알탕 한 번 할까나 하고 어르다 얼음장 아래로 흐르는 시린 겨울물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차를 대어 논 거림 주차장까지 20여분 내려오니 갑자기 날씨가 환하게 개이며 산위에서도 못 본 주능선이 멀리 하얀 눈을 이고 환하게 드러난다. 주능선의 겨울풍경은 산 위에서 보아야 제맛인데 하는 아쉬운 마음으로 이번 시산제 산행을 마무리한다.      

          

  권명환이 삶아온 문어도 소주로 해치워야 할 것 아닌가베. 시간이 일러 부산에서 지리산 신년회겸 뒷풀이를 하기로 했다. 지리산에서 해가 남아있는 이른 시간에 가기는 처음인 것 같다. 덕산 입구를 지나면서 시간이 있으면 탁영대를 들러보고가면 좋을텐데 하며 아쉬움을 말한다. 탁영대는 입덕문이 있었던 자리인 아래 덕천강가에 있는 바위다. 남명 조식선생이 여기서 꺽지회를 먹다 명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입안의 회를 뱉고 북향사배함으로써 이곳 강에 서식하는 꺽지들은 몸에 반점이 생겼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시천면 『덕산』은 남명 조식 선생의 산천재와 덕산서원이 있는 곳이고 남명의 제자들이 성지로 여기던 곳이다. 덕이란 덕산, 곧 지리산을 말함이다. (말은 그리해도 어쩌면 덕산은 남명 선생 자체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지리산이라는 크나큰 덕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덕산 입구에 입덕문[入德門]을 세웠는데 본래 바위굴을 통과하는 문이었다고 하며 국도 20호가 개설 확포장되면서 글자가 새겨진 부분만 떼어내서 현재 도로변에 세워두고 있다. 글자는 남명의 제자 도구 이제신(1510~1582)이 썼다. 입덕문에서 조금 더 가면 덕천강가로 툭 튀어나온 곳에 수위관측소가 있는데 도구 이제신이 은거하였다는 도구대다. 아직도 시퍼런 소가 돌고 경치가 매우 뛰어난 곳으로서 이대장은 옛 기록을 보고 혹시 각자[刻字]라도 있을라나하고 기웃거려 보았다고 하는데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덕산은 또 명암 정식선생이 구곡산 아래 무이정사를 짓고 은거하던 곳이기도 한데 성리학에서 神급 대우를 받는 주희가 푸젠성(福建省) 무이산(武夷山) 9곡 중 5곡에 무이정사를 지어 성리학을 가르친 것을 본 딴 것이다.   

   

  부산에 도착하여 8명이 오랜만에 저녁자리를 함께하니 감회가 새롭다. 동래구청앞 대궐갈비의 삼겹살이 감칠맛나게 부드럽고, 목구멍을 타고 도는 맑은 소주와 혀끝을 감돌아 나오는 산우들의 말들이 귓가에 아름답고, 시산제에 썼던 문어를 새로 삶아 안주로 더불어 내니 비로소 2014년 지리산 시산제 산행이 끝남을 알겠더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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