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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모음

지리산 그 겨울의 서북능선

by 하얀 사랑 2014. 2. 14.

지리산 그 겨울의 서북능선
[염기훈 2014/02/13 12:45]

 

○ 일    시 : 2014.2.8(토) 

○ 산행코스 : 덕동마을 07:40 - 세동치 - 바래봉 - 바래봉동릉 - 배너미재 - 장항마을 16:40

○ 산행인원 : 4명 (이재구 한영택 김택영 염기훈)

 

  지리산 서북능선은 성삼재에서 만복대 정령치 고리봉 세걸산 바래봉 덕두산을 잇는 장구한 산길이다. 백두대산의 산줄기가 함양 백운산에서부터 그 높이을 한껏 낮추며 고남산과 수정봉을 지나고 운봉고원 넓은 평원을 만들며 지리산과 만나는 곳이 서북능선의 고리봉이다. 그래서 서북능선을 걷다가 북쪽 백두대간을 보노라면 대간이 우습게 보일 수도 있으니 지리산 줄기 이기에 가능한 것이라. 

 

  그 서북능선에는 철쭉으로 유명세를 타는 바래봉이 있어 봄이면 늘 인산인해를 이루고 가을이면 구절초 아름드리 피지만 한편으로는 서북쪽에서 지리산주능선을 감싸안고 있는 형국으로서 겨울이면 북풍한설을 온몸으로 받기 때문에 눈이 많이 오는 곳이기도 하다. 이번 산행은 덕동마을 주민들이 운봉장을 넘나들던 옛길을 따라 세동치에 올라, 이후 바래봉까지 지리주능선에 취하여 걷는 서북능선, 그리고 인적없는 숲길로 배너미재를 거쳐 노루목까지 아름다운 눈길 따라 하루의 배부른 산행이 기다린다.  

 

 

 

 

 

  04:45 부산출발 산청휴게소에서 아침을 먹고 인월을 지나 지리산 안으로 들어서자 날씨가 찌푸등하며 작은 눈발이 날린다. 산내 덕동마을 입구 쯤 음지진 도로 커버길에서 차가 눈길에 미끌어지며 가드레일을 살짝 박았지만 속도가 낮았기에 차도 가드레일도 이상은 없다. 덕동마을 감나무식당 주차장에 도착하니 7:40분이다. 이 마을에도 민박집이나 음식점 등이 많은데 겨울 아침이라 조용하다. 

 

  곧바로 채비를 하고 덕동마을을 출발하여 눈발 날리는 지리산으로 들어선다. 우리가 매달 산행을 하지만 가을 지리산 단풍를 제대로 본 적이 별로 없고 겨울 지리산 설경을 완상[玩賞]한 기억도 몇 번 없다. 대개 정해진 날에 가다보니 그러한데 그러나 산에 대한 기대는 기대만으로서도 좋은 것이고 첫 발걸음을 내딛을 때는 작은 설렘이라도 가슴에 품는 법, 이번에는 순백의 서북능선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 상상하며 세동치를 향해 산행을 시작한다.         

 

  

 

  어제그제부터 눈이 내렸는지 숲은 온통 눈꽃을 뒤집어 썼는데 황량한 겨울의 빈 나무가지에 붙어 홀로 녹색의 삶을 이어나가는 겨우살이도 보란 듯이 눈을 맞았다. 주로 참나무나 물오리나무 등 키 큰 나무 꼭대기에서 서식하며 영양분을 섭취하기에 기생식물이라 한다.        

 

   "저 넘들도 인간의 손이 닺지 않는 높은 곳을 골라 자라는 모양일세"

   "뭐 그런 점도 있겠지만 햇살과 바람이 잘 들고 새들이 과육을 먹고 똥도 싸는 곳에 자리를 잡다보니"

 

  긴 낚싯대 같은 것에 낫날 같은 것을 달아 채취하러 다니는 약초꾼도 있던데, 항암 동맥경화 예방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등 여러가지 약효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차로 끓여 마시면 구수하니 좋다.  

 

 

  덕동에서 세동치의 산길은 옛날 덕동 사람들이 산너머 운봉 장을 드나들던 오솔길이다. 산내에서 운봉 장에 가는 고개는 부운마을에서 가는 부운치, 팔랑마을에서 가는 팔랑치 등이 더 있으니 옛사람들이 무거운 등짐 지고 지팡이에 의지하며 열어놓은 그 산길을 배낭에 술 담고 밥 담아 오르자니 살짝 미안한 마음이 묻어나기도 한다. 8부능선 쯤 올라갔을까 앞장 선 이대장 도로 내려오며 이 길은 세걸산 가는 쪽이라며 능선을 오른쪽으로 가로질러 간다. 지리산 그 많은 계곡과 골짜기에 숨은 산길을 언제 다 섭렵했는지 혹시 함께 오기 전에 미리 두세 번 답사하는 건 아닌가 고개를 꺄웃거릴 정도로 잘못 든 길은 금방 되돌리는 순발력을 가졌다. 

 

 

 

 

  능선 가까운 곳에 샘물이 흐르는데 세동치샘이다. 산속 모든 생명들이 긴 겨울을 이겨내랴 힘겨운데 작은 샘물 하나 온전하게 제 소임을 놓지 않고 힘차게 흐르고 있으니, 그러니 어찌 알았겠는가 지리산 산중 샘 하나가 아득한 봄소식을 여기서 전하고 있었을 줄을...

 

  지리산 어지간한 샘에는 컵이나 그릇 같은 것들이 놓여 있는데 목마른 이들을 위한 누군가의 배려일 것이다. 여기도 나무가지에 작은 국자가 하나 걸려있어 시원하게 한 모금 할 수 있다.     

 

 

  막걸리 한 잔, 찌지미 놓고 아름다운 풍경이 있게 해 준 감사의 인사와 지리 주능선이 환하게 개이도록 기원하는 소박한 의식을 치른다.  "지리산의 오늘 날씨는 신령님께 달렸으니 우짜든동 주능선도 보이도록 해주시고..." 배낭에서 술 나올 때 마다 누군들 이리 정성을 드리겠는가? 그 덕인지 한 치 앞조차 흐리던 시계가 환해지더니 산 아래 부운마을이 어렴풋이 드러나고 바래봉을 바라보는 서북능선 위의 희뿌연 안개구름도 바람을 타고 흩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약발은 딱 그기까지....주능선을 향한 로망은 사라져가고....애민 지리산신령님 탓만 해댄다.

 

   "아~씨, 내 부탁은 잘 들어주는데......"

   "혹시 주능선에서 다른 늠들이 그기만 개이도록 청탁한 것 아닐까?"

   "아니면 여기저기 주는 술에 취해 정신줄을 놓았을 수도...

 

  서북능선의 또다른 묘미 하나는 걸으며 장구한 주능선 삼정능선 심마니능선 반야봉 만복대를 바라보는 것인데 날씨 탓, 모르쇠로 일관하는 신령님 탓, 날 잡은 늠 탓 등을 하며 가니 드디어 감탄사가 나오는 풍경도 펼쳐진다.

 

   "죽인다. 날 누가 잡았노"         

 

   몇 사람이 새벽 3시에 구인월에서 출발하여 덕두봉 바래봉을 거쳐 오는 중이라며 지나치는데 사람을 처음 만난다며 반가워 한다. 한 밤중에 출발하여 겨울 태극종주코스를 타는 대단한 사람들이다. 게다가 여성도 한 분 있다.   

 

 

 

  조금 전까지 침침하던 시야가 환해지더니 새로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눈발 송송 날리는 희뿌연 하늘을 배경으로 삼고 은백색으로 치장한 산색과 작은 숲들에 가지가지에 내려앉은 눈송이들이 꽃을 피우고 큰 숲들에 작은 눈바람이 가지를 흔들고 지나는 능선 위로 유유자적 흘러가듯 난 산길 위의 풍경은 오랫동안 간구했지만 마딱뜨리지 못했던, 오직 자연만이 그릴 수 있는 흑과 백의 농담이 어우러져 토해내는 무설토[無說土]의 세계다.

  

  차라리 거센 바람이라도 불었으면 그런 풍경조차 날려버릴 수 있으련만 바람 고요한 그 처녀지의 산속을 지나자니 한 점 부끄럼이 앞서 나간다.  

 

 

  바래봉 인근에는 1971년도부턴가 면양을 기르기 위해 벌목을 했는데 양들이 독성이 있는 철쭉만 남겨둔 것이 지금의 바래봉을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이다. 매년 5월경이면 팔랑치에서 바래봉 인근까지 화려한 철쭉으로 길이 미어 터질 정도로 북새통을 이루며 인파가 몰리는데 운봉읍에서 접근하기가 쉽기에 그렇다. 하지만 철쭉 대신 목화송이 같이 우아한 눈꽃을 가지가지마다 맺은 서북능선의 겨울이 화사한 오월의 봄날의 풍경보다 못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팔랑치에서 바래봉 돌아드는 언저리는 해발 1,000미터 이상의 지리산 고지대에서는 보기 드문, 오래 전에 조림을 한 것으로 보이는 잘 가꾸어진 전나무숲이 넓은 자리를 차지하며 마음을 풍요롭게 해준다. 겨울 숲길을 호젓이 걷는 마음을 아는가.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니...     

 

 

 

  바래봉샘은 바래봉 바로 아래 길가에 있다. 산객들이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돌절구통 2개를 가져다 놓은 것까지는 좋으나 그 위에 자기네들 회훈인지는 모르겠으되 돌에 글자를 새겨 놓았다. 

 

    1. 진실한가.

    2. 모두에게 공평한가.

    3. ....

    4. .... 

 

       운봉로타리클럽

 

   무주상보시라고, 보시할 때는 도와준다는 마음조차 가지지 말라 하지 않았던가. 대개의 사람들이 남을 위해 베푼다는 것이 어떤 마음으로 한다는 것인가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 바라봉샘터 같다. 로타리클럽 회원들이면 대체로 그동네 한다하는 사람들 모임일진대, 물 한모금 보시하면서 일장훈시를 하여 목마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이대장, 누가 그러더라나. "아, 쒸바! 비싼 물 마셨다"               

 

 

  운봉 쪽에서 올라오면 접근이 쉽기에 바래봉 인근에는 등산객들이 많다. 바래봉에 오르니 삼삼오오 "철수야, 영희야! 치즈, 김치" 사진을 찍고 설경을 즐긴다.   

 

 

 

   오후 1시반이 넘었다. 바래봉에서 바래봉동릉으로 하산한다. 동릉 산길은 경사가 급하고 능선이 길어 사람들이 더러 다니는 길이 아닌 듯하다. 하산길이 세 시간 정도 소요된다니 만만치 않은 코스다. 이날 날씨가 춥지않고 습기가 많은 눈이 내린 탓에 등산화 아이젠에 눈이 달라붙어 마치 하이힐을 신고 걷는 기분이다. 

 

  눈의 종류에도 몇 가지가 있어 온도가 낮을 때 내리는 가루눈 같은 것은 잘 뭉쳐지지 않기 때문에 발에 잘 달라붙지 않는데 기온이 높을 때 오는 습설은 수분이 많아 잘 뭉쳐진다. 눈사람 만들기 좋은 눈이지만 아이젠 바닥에 자꾸 엉겨붙으니 신발을 나무나 바위에 차서 들러붙은 눈더미를 털어내어도 세 발짝만 움직이면 도로 마찬가지다. 눈과 함께 깔린 낙엽마저 뭉쳐 올라오니 하산길은 그야말로 고역이다.

 

  낙엽쌓인 산길은 미끌어질 위험이 큰데 그 위에 눈까지 오면 여리박빙 살얼음판을 걷는 것이라. 등산 다닌 이후 이번 산행에서 가장 많이 스라이딩하는 것 같다. 아니다다를까, 한대리 어어~하는 사이 계곡으로 20여미터나 미끌어져 내려가더니 겨우겨우 기어올라온다. 다행히 절벽이 아니어서 다친 곳은 없다. 그래서 결국 아이젠을 벗고 걸으니 오히려 훨씬 수월하다.    

 

 

 

  966봉에서 좌측능선으로 내려가다 첫 배너미재에 도착하니 좋은 산길이 나오는데, 이대장, 그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능선따라 계속 가야 한단다. 두 개의 배너미재가 있는데 두 번째 배너미재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모양이다. 등어리 땀이 배어 옷은 다 젖었는데 좋은 길을 보면 미련이 생기는 법이라. 

 

   "아니, 좋은 산길 놔두고 왜 그리 가오"

   "처음부터 계획이 그리 되어 있슴돠."

   "…"

 

 

  두 번째 재에 도착하니 이 길은 남원 인월에서 함양 금계까지의 지리산 둘레길 3코스 중에 있는 배넘이재다. 「배넘이재」란 이름은 전국에 더러더러 있는데 "배가 산을 넘었다."는 홍수설화 같은 것이 대개 붙어 있다. 가지산 아래 천문사에서 심심이골로 넘어가는 곳의 배넘이재도 그렇고 아예 한자로 주월산[舟越山]으로 해 놓은 곳도 있고...산길이나 지명 등에 대한 이대장 해박한 지식은 전문가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하니 잘못 전해지고 변형된 그 뜻에 대해 언성을 높일 수 밖에 없다.

 

 『대부분 지명은 그 어원을 추적하여 정확한 뜻을 알아보는 것보다는 현재의 이름에서 거꾸로 끼워맞추는 경우가 허다하다. 반야봉 아래 노루목의 경우 노루가 목을 돌려 돌아보는 형상이라서 노루목이 되었다는 해석이 난무한 적도 있었는데, 도대체 산이 어떻게 생겨야 노루가 목을 뒤돌아보는 모습이라는 건지….

 

  또 피아골은 빨치산과의 전투 때 계곡이 피로 물들었다는 설, 배너미재는 배를 밀고 넘어갈 정도로 고개가 완만해서, 배나무(梨)가 많아서, 또는 아득한 옛날 대홍수 때 배를 타고 넘어간 고개라는 둥…. 일일이 거론하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얼척이 없는 지명풀이가 버젓이 나돌아다니고 있다.

 

  바래봉동릉은 남천(藍川)으로 뻗어내리면서 남북으로 장항과 장재동(장재기, 지금은 폐허) 마을을 끼고 있다. 두 마을간 넘나드는 고개가 ‘배너미재’인데 아래 위 두 개가 있다. 지금은 장항-중군間 지리산둘레길이 지나가는 고갯마루다.

 

  배의 어원은 (국어학자 서정범 교수와 우리말 연구가 배우리씨의 의견에 따르면)‘받’으로 보이며, 받은 원래 머리를 뜻한다. 머리로 받다고 할 때의 받이다. 박치기도 받치기에서 나왔다고 본다. 머리팍 대갈팍의 팍도 박에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머리는 꼭대기이므로 받에서 ‘산’이라는 뜻도 파생하였다. “받>박>바이>배” 받고개>박고개>백고개>뱃고개>배고개>배오개. 배달겨레의 배달도 박달과 같다고 한다. 박달이란 지명도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받>밝>박)

 

  웅석봉 곁의 밤머리재도 밤나무가 많다고 栗峴 栗峙로 표기하는데, 내 생각엔 받머리재를 발음하다 보니 밤머리재가 된 것으로 보인다. 배내골은 배나무가 많다고 梨川으로 해석하지만 '받내'(산 속의 내(川)로 보면 딱 맞아떨어진다. 물론 거기에는 밤나무도 배나무도 없다. 그러니 배너미재는 배(梨)도 아니고 배(舟)도 아닌, 산을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 그리되면 전국의 수많은 배티·배재·배고개(배오개) 등도 대부분 해명이 된다.

 

  전국에는 늘미 누르미 느르미 늘재 널미재 늘목 느진목 놀목 느르재 노르재 노루목 등의 지명이 많다. 대부분 낮은 고개, 늘어진 고개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널의 板, 넓다의 廣, 누렇다의 黃, 늘어지다의 於, 노루의 獐 등으로 변환되기도 하였다. 원래의 의미와 전혀 동떨어진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보니 지금 표기된 지명으로 풀이하면 엉터리가 되기 십상이다. 여기 장항(獐項)과 장재동(獐在洞)도 노루목과 노루재가 원뜻으로 보이며, 결국 같은 말이다. 그럼 노루목(노루재)은 어디일까? 두 곳의 배너미재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둘레길을 따라 장항마을 당산나무에 내려오니 16:40, 건너편은 벽송사 아랫마을이다. 택시를 불러 아침에 출발한 덕동마을까지 가서 차를 바꾸어 타니 산행이 끝난다.

 

   비록 서북능선의 일부구간이긴 하지만 오랜만에 눈구경 실컷하는 즐거운 산행이었다. 눈이 발이 빠질만큼 많이 쌓이지는 않았고 기온도 생각보다 온화하여 산행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였으며 (하산길을 제외하면) 아주 편안한 산길이었다.   

 

  겨울 서북능선은 아름다운 우리 산하의 재발견 또는 미처 모르고 있던 것과의 조우일까? 해서 산길을 걷는 것은 세상을 가로 지르는 것과 같이 무한한 것이고, 함께 가도 홀로 가고 있는 것이 산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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