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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 2013. 2. 2 (토) 05:20 ○ 코스 및 일정 : 달궁 08:00 - 버드재 - 새목재 - 하늘재 - 묘봉암터 - 묘봉치 - 만복대 - 만복대동릉 - 황령암지 - 매막봉 - 달궁 16:00 ○ 산행인원 : 5명(이재구 박노욱 한영택 송건주 염기훈)
지난 해 8.26 만복대 새벽 산행 후 하산하며 정령치 휴게소에서 달궁 계곡을 내려다 보며 이대장에게 황령암지가 어디쯤인지를 물었는데, 이대장은 만복대 달궁 마을 위 계곡에 있는데 만복대 동릉과 연결되는 곳에 있으니 다음에 한 번 가자고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 산행은 옛날 달궁마을 사람들이 장보러 다니던 구례 산동마을 장터길을 따라 묘봉치까지 가는 옛길 답사와 만복대로 올라 겨울 반야봉과 지리주능선을 보고 만복대 동릉을 따라 달궁마을로 하산하며 서산대사의 황령암기에 나오는 황령암 옛터를 찾아보는 코스로 정했다.
정령치와 황령 그리고 달궁은 이곳에 있던 마한의 피난도성과 관련이 있는 지명으로서, 서산대사의 황령암기에 보면 『지리산 반야봉 좌우에 두 고개(嶺)가 있으니 황령(黃嶺)과 정령(鄭嶺)이다. 옛날 한(漢)나라 소제(昭帝)왕이 즉위한지 3년만에 마한(馬韓)의 왕이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의 난리를 피하여 이 곳에 도성을 쌓을 때 두 고개에 황장군과 정장군이 공사감독을 하였으므로 그 姓을 따서 고개이름을 지었다고 한다.』라는 것과 『신라 진지왕 원년(576년) 운집대사가 중국에서 귀국하여 황령고개 남쪽에 사찰을 세우고 이 이름을 황령정사라고 했다고 한다. 그 암자의 규모는 가운데에 황금전이 있고 동쪽에는 청련각이 있으며 서쪽에는 백옥교가 있어 꽃과 대나무가 서로 비추어 그 그림자가 금지에 떨어지면 마치 안양세계와 같았다고 한다.』가 그것이다. 황령의 남쪽에 신라 때 절을 지은 이후 몇 차례 중창을 거듭하다 서산대사가 그 기문을 지은 것과 그 후의 자료들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는 절이 있었던 곳이다. 정령은 현재의 정령치이나 황령은 어디쯤인지 알려진 바가 없다.
달궁에 도착하니 8시다. 겨울산의 묘미는 아무래도 설산 산행인데 금요일 전국적으로 비가 많이 내렸고 지리산에도 폭우가 쏟아져 눈이 많이 녹았다. 달궁은 뱀사골 입구인 반선과 도계삼거리 중간쯤의 덕동리 마을 이름인다. 지금은 남원과 구례 인월로 나가는 737번과 861번 도로가 나 있고, 주민들 대부분은 행락객들을 대상으로 음식점 등을 하며 살고 있지만, 예전까지만 하더라도 지리산의 마지막 남은 비경이라 할만큼 반야봉과 만복대 고리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깊은 골짜기에 숨어있는 곳으로서 1949년 4월 지리산 유격대 참모장 김지회가 사살된 곳이기도 하다.
곧바로 산행을 시작하여 골짜기를 따라 1시간 10분 정도 오르니 도계삼거리에서 정령치 올라가는 도로가 나오는데 머목재다. 2008.11.22 백두대간 종주시 산불방지 입산금지기간이라 성삼재에서 정령치까지 2시간30분을 도로따라 걸은 적이 있었는데 도중에 머목재에서 쉬었던 기억이 있다. 도로따라 약간 아래로 내려가다 다시 산을 가로지르니 옛길의 흔적이 나타난다. 군데군데 묵은 곳을 제외하면 머목재 하늘재로 이어지는 옛길은 최근 산꾼들의 복원노력에 힘입어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것 같다. 달궁에서 구례 산동까지의 옛길을 걸은 사람들은 지리산에서 나는 각종 약초며 나물들 목기 등을 등에 가득 지고 산동장에 도착하여 장을 보고 주막에서 거나하게 한 잔으로 회포를 풀고, 다음날 해산물이나 소금 등을 지고 돌아왔을지 모른다. 화개장터를 배경으로 한 김동리의 단편『역마』가 역마실이 낀 장돌뱅이의 이야기를 그린 것과 같이 이 산길에도 그런 애환이 있었을 터, 그런 스토리텔링을 개발하고 산길을 열어 놓는다면 지리산은 그 깊이 만큼 이야기가 있고 재미를 더하는 산이 될 것 아닐까.
道 (길, 말, 도)
연암이 『열하일기』에서 여행을 시작하며 압록강에서 수석역관인 홍명복에게 뜬금없이 건넨 말이 있다.
"자네 길을 아는가?" "네? 무슨 말씀이시온지?"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게 아니야. 바로 저편 언덕에 있거든."
우리도 언덕 저편에 길이 있다고 굳게 믿어 그 언덕을 넘고, 계곡을 건너며, 능선을 가로지른다. 그러나 언덕은 언제나 저편에 있는 법, 어리둥절한 홍역관에게 연암은 "길(道)이란 물가 언덕과 같아 그 경계에 있다"고 말한다. 이 언덕과 저 언덕의 경계에 길이 있다니! '빛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경계', '닿지도 떨어져 있지도 않는다'는 경지, 연암은 "이것과 저것,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길을 잘 아는 이라야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나같이 길눈이 어두운 사람은 알 수 없는 말이다.
하늘재를 넘어 묘봉치로 가는 길은 소담스러워 길답다. 이런 길은 언제나 가도 좋을 성 싶지만 그래도 길은 길이다. 길은 道다. 道는 '길'도 되지만 '말하다'는 뜻도 되고 '도' 닦을 道도 된다. 문밖을 나서면 너무 많은 길이 있어 길위에서 길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니 아는 길만 살살 골라 다닐 수밖에 없다. 네비양은 그래서 필요한 건가? 문수보살이 유마거사에게 "어떤 것이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들어가는 것인가를 말해주십시오"하자 유마거사가 침묵으로 답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선(禪)은 말 길이 끊어진 경지, 언어도단의 상태를 도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주장한다. 말은 입밖에 내는 순간 헛소리가 되어 되돌아 내 입을 치고, 중생의 입장에서 道는 언감생심이고 불가득(不可得)이다. 그러니 '길을 걷는 것'이나 '말을 하는 것' 그리고 '도를 닦는 것' 모두 유혹이 따르지만 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묘봉암지
만복대에서 심원마을 내려가는 길과 달궁에서 산동 가는 옛길이 만나는 곳이다. 반야봉이 마주 보이는 아늑하고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고 옆에는 계곡이 있어 절터로 안성맞춤이다. 바로 인근에 묘봉치가 있어 구례 산동마을로 내려 갈 수도 있으니 옛날 장꾼들이 더러 묵고 갔을 수도 있는 곳이다.
어제 비가 많이 내린 탓에 계곡에는 폭포가 흐른다. 때아닌 엄동설한에 산 위에서 폭포를 만나니 그런 재미도 있다. 곧 묘봉암 위 묘봉치에 도착하니 성삼재나 산동마을 쪽에서 올라온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땀을 식히고 있다.
만복대
지리산에서 만복대만큼이나 편안한 산은 드물 듯하다. 어디서나 접근이 쉽고 산행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는다. 정령치에서 한 시간, 성삼재에서 3시간이면 거뜬하다. 산행시간 만큼이나 평원은 느긋하고, 시계가 넓어 일출과 일몰이 아름답고 겨울 설경을 즐기기에도 좋다. 그래서 만복대 설경을 기대하고 왔기에 어제 비만 아니었다면 하는 진한 아쉬움이 물밀듯 밀려든다.
정상에 서니 멀리 덕유산이 흰 눈을 이고 있는 것이 보이고, 서쪽 하늘가에 무등산도 그 봉우리를 드러낸다. 가까이 바래봉 종석대 노고단 반야봉과 왼편의 심마니 능선, 그 뒤의 삼정능선, 멀리 천왕봉이 큰 산줄기를 이어가며 맑은 겨울을 지킨다.
바람을 피해 점심을 먹고 왼편 만복대 동릉으로 하산한다. 동릉에는 눈이 많이 쌓이고 얼어 어제 많이 내린 비로로 다 녹지 않았다. 길은 편안하고 좋지만 눈이 무릎까지 쑥쑥 빠진다. 등산화 안으로 눈이 파고 드는 바람에 스패츠를 꺼내 착용하고 앞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
동릉을 타고 도로까지 내려오니 산 위 참나무에 겨우살이가 많이 자라고 있고, 산 위인지라 내린 눈은 얼다 녹다를 반복하며 도로는 빙판을 이루고 있다. 해서 이쪽 도로는 겨울내내 통제된다. 다시 황령암지를 찾아 달궁 쪽으로 내려간다.
황령암지
동릉을 타고 15분 가량 내려오니 계곡 아늑한 곳에 빈 폐사지가 자리잡고 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황령암지로 추정하는 곳인데 단정할만한 근거는 많지 않은 듯하다. 이유는 이곳이 "황령의 남쪽에 절을 세웠다"하는 황령암기의 내용 중 우선 '황령'이 어딘지를 밝혀내지 못했고, 오히려 정령의 동남 쪽에 가깝다. 또한 황령암의 위치를 결정적으로 입증할 만한 사료가 없기에 그렇다. 그런데 옛사람들의 방위 관념이란 것이 믿을만한 것이 못되는 것이 성종 18년(1487년) 10월 4일 남효온이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반야봉에 올랐다가 주위의 사찰을 적은 내용이 그의 추강집에 남아있는데 "만복대 동쪽에 묘봉암(妙峰庵)이 있고, 만복대 북쪽에 보문암(普門庵)이 있으니, 일명이 황령암(黃嶺庵)"이라는 것으로서, 이것 역시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묘봉암은 만복대 남쪽에 있으니 아마 실제 본 것이라기 보다는 다른 기록을 차용했거나 들은 이야기를 적었기 때문일 것이다.
576년 운집대사가 창건한 이래 황령암은 중창을 거듭하며 연연히 이어져 왔으나 "무술년(戊戌 1538 중종33)에 난리로 모두 없어졌다"가 1545년 성희법사가 다시 중창을 하였고 서산대사가 황령암기를 쓴 것은 그가 입산한 1556년 뒤의 일로 짐작된다. 용담스님의 지리산황령암 중창기에 따르면 1747년 화재로 절이 다 불터버렸고 1749년 중창공사를 시작하여 1753년 마무리하였다고 되어있고 또 당나라 징관(澄觀)스님의 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疎演義抄) 목판본이 1893년 황령암에서 발간되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고 하나, 그 후 언제 다시 폐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그 이름만 황량하게 떠돌 뿐이다.
서산대사가 황령암기에 적은 '무술년의 난리'란 신륵사(神勒寺)의 승려들이 유생들을 박대했다는 이유로 관가로 잡혀가고 사찰이 불태워졌던 사건이 있었는데, 황령암도 이 때 불태워 진 것으로서 아마 전국의 수많은 사찰들이 유생들에 의해 수난을 당했던 모양이다.
지리산 유람록인 방장산선유일기를 쓴 성여신의 경우 불과 23세일 때인 1568년 서산대사 휴정이 지은 삼가귀감을 지리산 단속사에서 찍자 불가, 선가, 유가귀감 중 유가귀감이 맨 나중에 있다는 이유로 삼가귀감의 목판을 불사르고 사천왕상을 부수어버리라고 했다. 승려들이 말을 듣지 않자 아예 절집에 불을 질러버렸다. 성여신이 이 일을 뒤에 남명에게 고하자 "내가 만일 그 일을 알았다면 어찌 권장했겠는가마는 이미 지난 일을 더 이상 허물하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이니 유자들에 의한 불교탄압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겠다.
폐사지에는 주춧돌과 오래된 기와파편 몇 개, 깨진 막사발 몇 점만이 뒹굴고 절 터 앞으로 반야봉이 덩그마니 바람막이처럼 서 있다. 넓은 공터는 산돼지며 야생의 동물들의 놀이터인듯 자국들이 지천이고 서쪽 기슭에는 지금은 메워졌지만 연지로 보이는 곳이 있다. 이는 통도사 극락암의 연지 위에 극락교처럼 연못 위로 가녀린 백옥교가 아치를 그리며 가로질러 있는 듯 연상된다. 그러나 환지본처(還至本處)라고 폐사지를 지키고 있는 나무 한 그루, 이끼낀 돌 무더기,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지나는 바람 한 점 모두 원래의 것 아닌 것이 없는데 무엇을 상상하고 있는가. 원래 있던 빈 공간이 거추장스럽게 장식하고 있던 그 가람의 자리를 다시 차지 하고 있을 뿐이니, 빈 절터에 서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그 흔한 말을 다시금 새기게 되는 것이라!
하여 오래 묵은 주춧돌과 축대사이로 새로 깍은 대리석을 끼워 넣거나 복원이란이름으로 폐사지에 덩그마니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도 마땅찮은 일이거니와 그 이름조차 잃어버리는 것은 더욱 가당찮은 짓이다. 지리산지역에 203개의 폐사지가 있다고 하며 이것을 찾는 일도 열정적인 일부 지리산꾼들이 하고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달궁마을 뒷산의 천년송 큰괭이복고
황령암지에서 30여분 내려오니 멋진 소나무가 달궁마을 뒤편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데 천년송이라! 건너편 와운마을 천년송보다 작지만 운치는 더하다. 전설이 있는데 친절하게 안내판에 써 놓았다.
이야기인즉슨『마한의왕이 피난의 고됨을 잊으려고 낮잠을 자다 백제의 기를 누르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은 고양이 형상을 한 바위가 백제왕을 깔고 있는 꿈이었는데 눈을 떠 보니 누운 자리가 바로 고양이 형상을 한 바위였다나. 그래서 그곳을 괭이복고라 부르고 소나무 여러그루를 심은 것이 천년송의 유래』라고 한다.
황령암기에는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피난을 왔다고 했는데 왜 백제일까? 진한은 오늘날 신라지역이고 변한은 가야지역으로 인식된다. 마한은 백제가 통일을 이루기전 부족국가들의 통칭이다. 양서(梁書) 동이열전에 『백제는 그 시초가 동이의 삼한국( 三韓國)인데 하나는 마한이요, 다른 하나는 진한이요, 또 하나는 변한이었다. 변한과 진한은 각각 12나라가 있었고 마한은 54나라가 있었다. 대국(大國)은 1만여가, 소국은 수천가로서 모두 10여만호가 되었는데, 백제(百濟)는 곧 그 중의 한 나라였다. 뒤에 점점 강대하여져서 여러 작은 나라들을 합쳤다.』는 기록과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마한(馬韓)은 삼한(三韓) 중에서 서쪽에 위치하는데, 성곽은 없으며, 초가집을 짓고 살며 활, 방패, 창 등을 잘 다루었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달궁이라는 것도 소규모 부족집단이, 요즘으로 치자면 읍면 정도? 백제에 쫓겨 백두대간을 넘어 피난와 지리산을 성곽삼아 은거한 지역으로 짐작된다.
그러니 달궁의 왕이 꿈을 꾸다가도 백제왕의 기를 누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겠는가. 아니면 오히려 백제왕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가위눌려 벌떡벌떡 일어나 식은 땀을 흘렸을 수도 있었겠고... '달의 궁전'과 같은 아름다운 이름은 호사였을지도 모르겠다.
천년송에서 내려오니 오후 4시, 산행이 끝난다. 겨울이라 산행코스를 당기기는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조금 빠르다. 이번 산행은 지리산에서도 옛사람들이 다니던 옛길을 따라 걷고 그 길을 음미하며 두 폐사지에서 허허로움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또 달궁의 유래와 정령치 등 고대사에 관련된 지명과 그 시간 속으로 스쳐간 이야기들을 돌아 보았다. 산행이 산길만 걷는 것이 아니듯 지리산은 그냥 산이 아니고 그 속에 역사를 품고 있기에 더 재미있는 것 아니겠는가. 부산으로 가서 산행 쫑파티를 하고....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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